+ 방선배님~ 1027

사탄교 바이블

사탄교에도 바이불이 있는데, 그 첫 구절은 이렇습니다. "네 삶의 주인은 너 자신이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 때부터 지금까지 이 한 가지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네가 하나님이야. 네 마음대로 살아. 네 욕심껏 살아도 돼." 사탄이 우리에게 스스로 하나님이 되라고 집요하게 공격하는 이유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망한다는 것을, 낙원을 잃어버리고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주인 되고 싶은 마음, 하나님 자리에 앉고 싶은 마음, 자기 욕심껏 살고 싶은 본능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하나님 뜻을 떠나 이 본능을 따라서 내 마음대로 살기 시작하면 반드시 추락합니다. 이를 이기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주인 삼고, 하나님 ..

+ 방선배님~ 2022.04.12

성만찬

예수님이 제자들과 나누신 마지막 유월절 식사는 성만찬 제정과 관련됩니다. 떡은 예수님의 몸을, 포도주는 죄인을 구속하기 위해 흘리신 피 곧 언약의 피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인류의 죄를 단번에 해결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짐승의 피를 뿌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거룩한 삶 없이 짐승의 피로 드리는 그들의 제사는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할 뿐이었기에 하나님은 새 언약을 약속하셨고, 그 언약은 마침내 예수님의 피를 통해 체결됩니다. 짐승의 피는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내어주신 살과 피는 우리에게 죄 사함의 은혜와 영생을 선물했습니다. 성도는 성만찬을 통해 주님의 희생을 깊이 새기고, 후일 메시아가 베푸..

+ 방선배님~ 2022.04.11

하나님의 계획은 정확히 이루어진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은 이 유월절에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팔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죽일 흉계를 꾸미지만 백성을 두려워해 주저합니다. 이때 가룟 유다가 그들을 찾아갑니다. 정치적 메시아가 아님을 안 가룟 유다는 배신자가 되어 예수님을 은 30에 넘겨주기로 약속합니다. 가룟 유다는 3년간 예수님과 함께하고도 그분을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으려는 계획을 잠시 멈춘 것은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속으로 흉계를 꾸미면서도 의식적 정결은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기치 못했던 가룟 유다의 배신이 '명절에는 하지 말자'던 그들의 계획을 도리어 속행하게 ..

+ 방선배님~ 2022.04.08

세계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케리

세계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케리는 직조공의 아들이었는데, 그가 세계적인 선교사가 된 후 인도 총독이 주최한 연회에 참석했습니다. 한 장교가 "당신은 과거에 제화공이 아니었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아니요, 저는 그보다 더 아래인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선교를 충성되고 헌신적인 일로 보지만, 케리는 자기처럼 무능한 자를 구원하시고 사용해 주신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윌리엄 케리는 학벌도 돈도 없었습니다. 선교를 나갈 때도 영국 교회는그가 자격이 없다면서 파송하지 않았지만, 케리는 대단한 학벌의 사람도 못 한 큰일을 했습니다. 대학을 세웠고, 성경을 16개국 언어로 번역했으며, 인도에 도덕적 씨앗을 뿌렸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주님 때문에 감사하고 주님..

+ 방선배님~ 2022.04.07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는 이른 아침부터 나가 품꾼들을 찾는 포도원 주인과 같습니다. 품꾼이 포도원으로 부름받을 때는 이른 아침일 수도 있고 늦은 오후일 수도 있습니다. 성도는 1시간을 일하든 10년을 일하든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에서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사명을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원칙은 세상의 기준과 다르며 우리 능력이나 공로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은혜로 삯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의 구원 문제에서 인간의 노력은 설 자리가 없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이 절대적 요소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긍휼이 드러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은혜로' 천국 백성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의는 그 은혜에 의..

+ 방선배님~ 2022.03.31

하나님 나라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며 그분 뜻을 잘 행하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 이야기에 등장하는 맏아들처럼 말로는 순종하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습니다. 반면 세리와 창녀들은 부정한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세례 요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선포될 때 그것을 믿고 따랐습니다. 겉으로는 순종하는 것처럼 반응하지만 실제로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 처음에는 불순종하지만 결국 죄를 뉘우치고 말씀을 따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실제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식과 평판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진정으로 순종하는지 여부가 믿음의 핵심입니다. ..

+ 방선배님~ 2022.03.31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칼 마르크스는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무신론이야말로 가장 아편과 같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없다면 윤리도 법도 의미 없어져 세력을 잡은 자가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편에 취해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면서도 아편 같은 것을 추구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는 관심도 없으면서 초자연적 능력이나 복만 받으려 합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이나 십자가를 지는 일에는 관심 없습니다. 오로지 '나'의 문제가 다 해결되어야 한다고 소리칩니다. 예수님은 "내 제자가 되려면 너의 십자가를 지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는 자는 그 영광에도 동참할 수 없습니다. ..

+ 방선배님~ 2022.03.29

사랑의 심판자, 예수님

우리는 평가만 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않고, 나를 위해 희생해 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줍니다. 하나님이 단지 우리의 최종 심판자가 되신다고 하면 두려워서 그분을 따르기는 해도 그분과 즐겁게 교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즐거워하기를 원하셔서 고난당하는 약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자신을 약함과 수치로 나타내 보이셔서 우리가 무장 해제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와 힘, 심판의 권한과 영광만을 드러내며 오셨다면 결코 예수님을 즐겁게 따르거나 그분 앞에 자발적으로 무릎 꿇지 않았을 것입니다. 심판자이시되 그 심판을 자신에게 돌리기로 선택한 사랑의 심판자이신 예수님. 그분을 따르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증명하시겠다는 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그는 멸시..

+ 방선배님~ 2022.03.25

산기슭 나무의 냄새에도 순서가 있다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산 정상에 서면 바람 때문에 아무 냄새도 나지 않지만, 산기슭은 온갖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합니다. 나무 박사 우종영의 책 를 보면, 산기슭 나무의 냄새에도 순서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생강나무가 자신의 냄새를 거두기 전까지 산수유 열매는 자신의 냄새로 행인들의 발목을 잡지 않습니다. 나무들이 자신의 때를 기다렸다가 몽우리를 터뜨리고 냄새를 발하기 때문에 산에 가는 길은 계절과 상관없이 항상 즐거울 수 있습니다.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다른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 다름을 인정하는 겸손이 심긴다면, 너의 아름다움과 나의 아름다움이 엄연히 다름을 알고 비교하지 않게 됩니다. 겸손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성품이며 선물입니다. 이제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겸손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나의 때가 ..

+ 방선배님~ 2022.03.25

'와 보라.'

한때 교회 성장론이 한국 교회를 휩쓸었습니다. '와 보라.'가 한국 교회의 단골 전도 표어였습니다. "우리 교회 한번 와 봐라, 우리 목사님 설교 한번 들어 봐라." 그때의 '와 보라.'는 예배당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와 보라.'의 대상을 우리 삶의 현장, 일터로 확장시켜야 합니다. 당신이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우리는 답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사는 터전을 그들이 보고 우리처럼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아무리 많아도 교회로 인해 세상은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집과 일터는 투명한 유리가 끼워진 진열장 같아야 합니다. 누구든 들여다보고 예수 믿고 싶어지는 삶의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 방선배님~ 2022.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