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바깥 세상 193

[홍익희] [24] 향신료 전쟁 ①

후추·육두구·정향, 향신료가 바다의 주인을 바꿔버렸다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24] 향신료 전쟁 ①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입력 2023.04.30. 08:00업데이트 2023.04.30. 18:54 후추 등 향신료(香辛料, Spice)는 경제사에서 상상 이상의 중요성을 갖고 있다. 근대의 막을 연 항해 시대와 식민지 획득 경쟁은 바로 향신료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대 자체가 향신료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는 육류의 맛을 내는데 동양의 향신료가 필수적이었다. 심지어 향신료는 전염병 예방과 악취를 없애는 의약품으로도 사용되었다. 향신료 중에서도 인도의 후추, 동인도 제도의 육두구, 몰루카 제도의 정향이 대표적이었다. ◇실크로드가 막히자 향신료 가격이 폭등하다 동방무역을 가로막은 오스만..

[홍익희]유대인[59]절벽 요새 ‘마사다’ 전투

960명이 로마군단에 맞서 2년 항전… 이스라엘의 저항정신 되다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59] 절벽 요새 ‘마사다’ 전투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입력 2023.04.25. 03:00업데이트 2023.04.25. 05:23 파괴되는 예루살렘 - 빈 미술사 박물관에 소장된 17세기 프랑스 화가 푸생의 1638년 작 ‘티투스의 예루살렘 파괴’. 1차 유대 로마 전쟁 때인 서기 70년 로마의 총사령관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파괴하는 장면이 담겼다. 당시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함락한 뒤 살육과 약탈을 했다. 성전 수장고에 숨어 있던 여자와 어린이 6000명은 산 채로 불태워졌다. 당시 가나안에 살던 유대인 240만명 중 절반 가까운 110만명이 살육당하거나 굶어 죽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헤롯 시대에 가나안 지..

[주경철] [87] 1450년경에 만든 세계지도

“인도 가는 길 있다”… 수도사의 지도가 콜럼버스 내비게이션 됐나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87] 1450년경에 만든 세계지도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3.03.21. 03:00업데이트 2023.03.21. 03:03 중세 유럽의 세계지도(마파문디·Mappa Mundi)는 기독교적 시각에서 세계를 파악하여 그렸다. 단순히 객관적 지리 정보를 제시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자체가 하느님의 뜻이 구현되는 무대라는 의미다.(86화 참조) 그렇지만 언제까지 이런 꿈 같은 세계상을 고집할 수는 없다. 대항해시대의 서막이 열리던 15세기 중엽이 되면 새로운 세계 인식을 담아내는 혁신적인 지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의 수사 프라 마우로(Fra Mauro)가 제작한 지도가 ..

[주경철] [83] 해양제국 로마의 시작

‘우물 안 개구리’ 로마, 바다로 눈 돌리면서 세계사 주역이 되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83] 해양제국 로마의 시작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3.01.17 03:00 | 수정 2023.01.17 03:00 포에니 전쟁에서 병사들을 이끈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카르타고군에 승리를 거두고 인질들을 나포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 16세기 활동한 바티칸의 궁정화가 줄리오 로마노에 이어 18세기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세치가 완성했다. 해상 패권을 놓고 맞선 로마와 카르타고는 전략적 요충지 시칠리아 등을 놓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23년간 지속되었던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에 완승을 거둔 로마는 서부 지중해의 통제권을 장악하게 됐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고대 로마의 역사는 “시작은 미약하..

[주경철] [80] 19세기 근대 축구의 탄생

전진패스 안되고, 핸들링 허용… 초기엔 英동네마다 룰 달랐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80] 19세기 근대 축구의 탄생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2.12.06 03:00 부상 선수 속출했던 19세기 사립학교의 축구 - 영국 런던 북서부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명문 사립학교 해로스쿨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축구 경기를 하는 모습을 화폭에 담은 화가 토머스 헨리(1852~1937)의 그림. 19세기 중반부터 영국의 사립학교들은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믿음으로 격렬한 스포츠의 대명사인 축구를 교육 수단으로 적극 권장했다. 당시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이 과격하게 경기하다 중상을 입는 일도 속출했다. 이런 운동 스타일은 졸업생들에게는 소중한 전통으로 인식됐다. /위키피디아 오늘날 세..

[주경철] [77] 괴물들과 싸우는 헤라클레스… 그리스 식민지 정복 과정이었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77] 괴물들과 싸우는 헤라클레스… 그리스 식민지 정복 과정이었다 헤라클레스의 12과업… 신화와 역사 사이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2.10.25 03:00 헤라클레스의 12과업 - 헤라클레스의 열두 과업을 새긴 조각상. 튀르키예의 유누슬라르 마을에서 발견된 이 조각상에는 네메아의 사자를 처치하는 첫 과업부터 하데스의 출입문을 지키는 머리 셋 달린 개 케르베로스를 잡아오는 마지막 과업까지의 모습이 형상화돼 있다. 그리스와 지중해 세계 각지의 괴물들을 처치하는 헤라클레스의 여정은 이웃 지역을 무력으로 침공해 식민지를 건설하는 과정을 나타낸다. /위키피디아 사자 가죽을 걸쳐 입고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있는 거구의 사내. 헤라클레스는 사실 밤에 길거리에서 만나면 ..

[주경철] [75] 교황이 헨리8세에 ‘신앙 수호자’ 칭호… 왕은 21세기에도 신성한가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75] 교황이 헨리8세에 ‘신앙 수호자’ 칭호… 왕은 21세기에도 신성한가 1000년 이어온 유럽의 왕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2.09.27 03:00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 - 1953년 6월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 이날 의례를 주관한 성공회 수장 캔터베리 대주교는 “영국은 하느님의 왕국에 더 가까워졌다”고 선언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70년간 영국 국민들을 단결시키는 통합의 상징으로 재위했고, 서거한 여왕의 후계자 찰스 3세가 내년 70년 만에 새 대관식을 치르게 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나 찰스 3세는 왜 국왕인가? 이들이 왕위를 차지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오늘날 사람들 대부분은 ..

[대만] 대륙이 한 번도 지배하지 못했던 섬, 대만

[주강현의 해협의 문명사­] 대륙이 한 번도 지배하지 못했던 섬 대만해협 주강현해양문명사가·전 제주대 석좌교수 입력 2022.09.21 03:00 대만해협을 바라보는 중국 푸젠(福建)의 샤먼(厦門) 앞바다에는 유럽의 식민 도시 구랑위(鼓浪嶼)가 떠있다. 아편전쟁 직후 유럽 열강이 개항장으로 차지한 섬이다. 바로 앞에 대만 영토인 진먼다오(금문도·金門島)가 있어 대만을 겨냥한 포대와 비행장이 도사리고 있다. 청나라 말기 서구 열강을 방어하던 호리(胡里) 포대를 비롯해 여러 포대가 남아있는 중국 남부 해변 곳곳에는 현대적 포대들이 대만을 노린다. 대만해협과 인근 바다에 흩어져 있는 펑후(澎湖)열도를 읽어냄은 중국의 현재와 미래를 읽어내는 지름길이다. 샤먼에서 묵은 호텔에서 건너편을 바라보자니 구랑위 동북 곶..

[주경철] [73]문화 꽃피웠던 르네상스 시대, 알렉산데르 6세의 ‘막장 정치’

교황의 사생아가 무려 3명… 그 중 딸을 세차례나 정략결혼시켰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73] 문화 꽃피웠던 르네상스 시대, 알렉산데르 6세의 ‘막장 정치’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2.08.30 03:00 르네상스를 뒤흔든 보르자 가문 - 영국 화가 존 콜리어(1850~1934)의 그림 ‘체사레 보르자와 한 잔의 포도주’. 교황 알렉산데르 6세(오른쪽에서 둘째)가 추기경 시절에 첩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체사레(왼쪽)와 루크레치아(왼쪽에서 둘째)가 모여있는 모습이다. 알렉산데르 6세는 딸의 혼사를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한 도구로 활용했고, 아들 체사레는 친형을 암살하고, 여동생의 애인과 배우자 역시 제거한 비정한 권력가였다. 루크레치아는 아버지와 오빠의 권력욕에 일생을 휘둘리며..

[주경철] [72]최후의 日제국군 오노다, 왜 1974년에 항복했나

軍國의 추억… 日, 29년간 밀림서 게릴라전 벌인 전범을 영웅대접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72] 최후의 日제국군 오노다, 왜 1974년에 항복했나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2.08.16 03:00 민간인 30명 학살한 패잔병에 환호하는 일본 - 1944년에 일본 정보 장교로 필리핀 루방섬에 주둔한 오노다 히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사실을 모른 채 숨어 지내다 1974년에 투항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오노다는 극우파 사이에선 진정한 사무라이로 불렸지만, 필리핀 주민을 살해한 옛 제국주의 군대의 패잔병이라는 평가도 뒤따른다. 사진은 오노다(가운데 탑승 계단 맨 앞 인물)가 1974년 3월 12일 도쿄 공항에 도착해 지면에 첫발을 내딛는 장면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945년 8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