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남용목사님

일곱번의 화(禍)선언 (마태복음 23장 13-36절)

colorprom 2019. 11. 22. 16:14

20191122 금


일곱번의 ()선언


마태복음 23장 13-36절 


본문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일곱 번의 화(禍)선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7’이란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곧 일곱 번 ‘화 있을진저’를 토로하신 것은 

더 이상 회복의 길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있을진저”는 헬라어로 “우아이”라 합니다. 이것은 감정을 나타내는 감탄사입니다.
안타깝고도 답답한 상황에 직면하여 혀를 차며, “오호”또는 “아”란 말을 터트린것과 같습니다.

 있을진저 말은 얼마나  고난을 겪게 될지, 얼마나 끔찍한 고난이 닥쳐올지

비통한 심정으로 탄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멸망길로 가는 자기 백성을 향하여 

일곱 번씩이나 비통한 심정으로 탄식하시며,

화를 면할 수 없는 저들의 그릇된 행동을 낱낱이 열거하시며,

제자들은 바른 행동으로 생명의 길로 이를 수 있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멸망의 길로 인도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첫째, 잘못 가르치는  대한 비판이 있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화 선언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의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잘못 가르침으로써 자신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능한 자들이라 자처했지만, 예수님이 보실때는영적인 눈이 감겨진 맹인이었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자로 세움을 받았다면, 내 지식과 경험을 의지하지 말고,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성령하나님께 겸손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종교적인 의무를 빌미로 윤리적인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비판이 네 번째 화선언에 나타납니다.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중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23절)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모두 값비싼 귀한 식물들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런 것들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했으나,

율법에 있어서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렸기에 예수님의 책망을 받습니다.


“정의”(디카이오수네)는 행동에 있어서의 공정성을 

“긍휼”(엘레오스)은 자비로운 행동,

“믿음”(피스티스)은 믿음직한 행동을 가리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중요한 것은 다 버리고, 중요하지 않은 것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맹인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24절)

율법과 예언의 핵심이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임을 알고,

우리의 마음중심에 늘 사랑의 샘이 솟아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겉과 속이 다르다는 비판입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의 화 선언이 이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5-27절)


예수님은 바리새주의 안에 있는 숨겨진 부패상을 공격하십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내부는 부패로 가득차 있어서 

죽은 시체가 가득한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데 열심인 것 같지만,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이려는 교만이 그들 마음속에 가득하였습니다.


영적 소경과 위선자된 이에게 임하는 마지막 종결지는 멸망임을 기억하면서,

우리들도  말씀과 기도로 늘 깨어, 주님이 인정하시는 가치있는  삶 살아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