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1997/08/14 17:48 52주년 광복절
## 광복 52돌...치욕의 역사현장을 찾아보자 ##.
【경주=박종인기자】
"하나, 나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다.
둘, 나는 마음을 합해 천황폐하께 충성한다.
셋, 나는 인공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국민이 된다."
그리고 경건하게 손을 씻고 종종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역시 경건하게 일본 건국신에게 경배하고 헌금하고….
일제 시대 경주에서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 철없이 이 곳에 들러 황국신민서사를 읊은 이 분명 있을 터.
광복 반세기가 넘었다. 그러나 일제 청산은 끝나지 않았다.
사는 곳, 혹은 유명 관광지 주변에서 식민지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파편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52주년 광복절을 맞은 오늘, 자녀들을 데리고 그 오욕스런 과거로 여행을 떠나보자.
지긋지긋하고 생각하기도 싫은 시대.
그러나 때로는 오욕과 치욕이 현재를 곱씹게 해주는 거울 역할을 하는 법.
역사 감각이 없는 어린이들에게 현장 답사는 말이 필요없는 위대한 교육자다.
천년 고도 경주, 그것도 도심 한복판에 아직 일본 시조신을 모시는 신사가 온전하게 있다.
경주지청 청사에서 경주역 반대방향으로 두블록 떨어진 골목 끝에 있는 기와집이 그 현장.
막다른 골목을 돌아서자마자 한국식 날렵한 곡선 처마와 달리
직선으로 이루어진 왜색풍 기와지붕이눈에 들어온다.
한눈에 사진에서 본 일본 신사건물임을 알 수 있을 정도다.
현재 건물 사용처는 '농촌지도소 중부상담소'.
내부는 모두 사무실로 개조했다.
이전에는 묘하게도 경주시 사적공원관리사무소 사무실.
경주국립공원내 왕릉과 궁궐, 사찰 등 관리 작업이 이 신사 건물에서 이뤄졌다는 얘기다.
주민들은 이 신사가 일본에서 최고급 목재를 들여와 조립된 것으로 알고 있다.
신사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절터였다는 소문도 돌지만 신사에 대한 기록이 일절 없어 내력은 전혀 알 수 없다.
'내력은 모르지만 어찌됐건 이 곳은 신사였음' 정도라도 적어내린 안내판이 아쉽다.
농촌지도소 관계자는 "총독부 해체에 즈음해 신사건물까지 헐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며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마저 없애버리면 애들한테 일제 잔학상을 어디가서 가르치는가'라며 반대하고 있다"
고 말한다.
충남 홍성군 군청사는 철거된 총독부의 축소판이다.
홍성은 의병거사지와 3·1만세사건의 땅.
일본은 이 홍성땅의 맥을 끊기 위해 경복궁과 똑같은 일을 저질렀다.
홍주(옛이름) 관아 정문인 홍주 아문과 본관격인 안회당 사이에 신식건물을 지어 버린 것.
그래서 지금 사료전시실로 쓰는 안회당과 아문은 이 콘크리트 건물로 막혀 있다.
마치 경복궁 근정전이 광화문과 오랜 이별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부수고 싶어도 예산이 없어서" 그대로 쓰고 있다고 한다.
등대박물관이 있는 한국 최고 등대인 포항 장기곶등대도 일본인들작품이다.
주민들은 "자기네 해양실습선이 이 앞 바다에서 좌초했으니 조선이 등대를 세워 책임을 지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호랑이 꼬릿불(호미등)로 불리던 지명도 등대 건설과 함께 토끼(장끼) 꼬리로 비하됐고
90년 세월이 흘러 이제는 어엿한 박물관이 됐다.
근처 구룡포공원에 신사로 오르는 긴 계단이 남아 있다.
대전시 중구 선화동에 있는 영렬탑은 '걸작 중의 걸작'이다.
높이 34.5m 둘레 20m의 거대한 이 탑은 애국전몰군경 위패를 모시고 있는 '숭고한' 성역이다.
이 탑이 기실은 1942년 일본인들이 돈을 모아 태평양전쟁 일본군 위패를 모셨던 곳이라면 어떨까.
해방 뒤 현충일 제정과 함께 보수, 영렬탑으로 개칭된 채 21세기를 맞고 있다.
이같은 곳들은 셀수 없다.
안내판 하나 눈에 띄지 않는 게 슬플 뿐, 보존이냐 철거냐는 그 뒷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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