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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중심이십니다 (누가 2:1~21) (CBS)

colorprom 2017. 4. 7. 14:02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중심이십니다 2014년 6월 7일 토요일


누가복음 2:1~2:21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 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하는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20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21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1절):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내란을 평정하고 로마제국의 초대황제가 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다.

40년이 넘는 통치기간 동안 제국의 기틀을 닦고 전성기를 열었다.

사후 로마원로원은 그를 신으로 선포했다.


천하로 다 호적하라(1절):

로마는 과세와 유사시 군대 동원의 능력을 알기 위한 목적으로 호적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주전 28년, 8년, 주후 6년에 실시하였다.


그때에 … 호적하라 하였으니(1절):

가이사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호적 조사를 명한 것은

통치 지역에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모든 사람은 자신의 고향으로 가서 호적 정리를 해야 했고,

이에 나사렛에 살던 요셉과 마리아는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다.

그런데 이는 메시아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예언을 성취하는 방편이 되었다.


이 호적은 구레뇨가……처음 한 것이라(2절): 요세푸스에 따르면 총독 구레뇨는 주후 6년에 총독이 되었다.

그럼으로 구레뇨의 인구조사 시기는 예수님의 탄생 년도(주전 5~4년)와 맞지 않는다.

여기에 대한 설명으로 최근에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구레뇨는 주전 12년부터 수리아의 최고사령관을 지냈다고 알려졌다.

그럼으로 이 인구조사는 주전 8년에 실시한 인구조사로 볼 수 있으며,

당시에는 이스라엘과 같은 속주의 인구조사는 몇 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이 구절이 ‘구레뇨가 수리아의 총독이 되기 전에’라고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주후 6년 이전의 인구조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4절):


인구 조사를 위해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고향의 기준은 태어난 곳이 아니라 재산이 있는 곳이었다.

인구조사 때문에, 나사렛에 거주하던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첫아들을 낳았다.

이로써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미가의 예언(미 5장 2절)이 성취되었다.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4절):

로마의 인구 조사는 군대를 징집하거나 세금을 걷기 위해 시행되었다.

이로 인해 나사렛에서 살던 요셉과 마리아는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는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미 5:2)을 성취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 지경에 목자들이(8절): 당시 사회에서 천대받는 계층이었던 목자들의 경배와

가축의 우리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을 기록한 것은 누가 뿐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10절):

구주가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들은 그 지역의 가난한 ‘목자들’이었다.

로마제국이 전했던 그들의 ‘복음’은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복된 소식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복음은 가난한 목자들까지 포용하는 온 백성의 복음이었다.

가난한 목자들이 복음으로 나아오는데 아무런 장애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복음의 핵심은 방금 태어난 아기가 그리스도이자 주라는 사실이다.

헬라어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번역으로, 방금 태어난 아기는 구약이 예언했던 메시아이시다.

또한 ‘주’는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되던 호칭으로, 방금 태어난 아기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복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무엇이 아니라, 자신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12절):

구유라는 표현이 세 번(7, 12, 16절)이나 등장하고 있다.

구유는 짐승의 먹이를 담는 통(여물통)이었는데,

이 땅에 오신 메시아께서는 굶주린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떡’이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절):

‘하나님께 영광이요’는 이 사건들을 일어나게 하시고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께 찬양의 초점을 맞춘 것으로,

그분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면서 땅에 있는 그분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시는 분이다.

여기서 언급된 평화는 메시아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이다.

하나님과 인간과 모든 피조물 사이에 온전한 화해를 이루는 평화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중심이십니다 2014년 6월 7일 토요일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무렵, 누가 보더라도 세상의 중심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였습니다.

그의 명령 한 마디에 천하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명령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미가의 예언이었습니다.

천하를 움직이는 황제조차도 하나님의 계획을 실천하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진정한 역사의 중심은 초라한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이셨습니다.

무엇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움직이고 있습니까?

세계 경제의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월 스트리트’의 금융가들입니까?

아니면 세계의 정치를 결정하는 강대국의 대통령들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최고의 학문과 기술을 자랑하는 석학들입니까?

세상은 그들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고 믿고 있기에, 그들과 같이 되려고 온 힘을 다합니다.

그러나 수십만이 넘는 세계최강의 군대와 막대한 경제력을 가진 아우구스투스가 평생 한 일이,

예수님의 탄생 계획을 이루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주인이신 동시에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사람들’만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상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그 역사의 중심은 굶주린 세상에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주신 예수님이십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마음에 새긴 이 신앙을 우리도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국을 이룬 아우구스투스와 갓 태어난 아기 예수 사이의 간극처럼,

세상은 한없이 강해 보이고 예수님께서는 무력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2,000년 전 베들레헴에서 벌어진 일을 기억합시다.

주권은 오직 삼위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 2014년 6월 7일 토요일


마태는 예수님을 경배한 사람으로 동방의 박사들을 부각하는 반면,

누가는 당시 천대받던 계층인 목자들의 경배를 부각합니다.

이는 마태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하고자 한 반면,

누가는 ‘구원자 예수님’을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주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 온 땅에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해주자,

목자들이 이 아이를 찾아가 사실을 확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기록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모든 인간들에게 좋은 소식임이 분명합니다.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분은 우리의 친구와 구원자가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야만 했던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유일한 독생자 아들을 죽이려고 이 땅에 보내시고,

또 그 아들이 마구간에서 태어나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던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우리에게는 기쁨의 소식이지만, 하나님께는 가슴 아픈 선택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원의 가치를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구원에 담긴 참 의미와 기쁨을 바르게 살아내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길입니다.


성탄의 표적 2015년 12월 25일 금요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과 천사를 포함한 온 우주 만물에게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탄생은 실로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분께서 이 땅에서 처음 누우신 곳이 나귀의 구유였습니다.

천사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들은 자들도 당대에 유력한 자들이 아니라 이름 모를 목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방식은 이러합니다.

하늘의 그 영광을 멀리한 채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나귀의 구유에 시작하신 그분의 삶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여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나귀와 같이 철저하게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낮아지시고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오늘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신화 속 인물들은 언제나 특별하고 신비한 모습으로 탄생합니다.

아기에게서 신비한 광채가 난다거나, 알에서 태어난다거나 하는 등

무엇인가 일반적이지 않고 특별하고 신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연약한 아기의 모습이셨습니다.

그분께서 보여주신 표적은 가축우리에서 짐승의 여물통에 누워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께서 구유에 누우셨던 것은, 근처 여관마다 사람들이 가득 차서

아무도 임신한 여인을 위해 방을 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표적은 신비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께서 보여주신 표적은, 곧 가장 낮고 낮게 오셨으며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버림받는 메시아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려 십자가에 달리신 사랑 앞에 겸허히 무릎 꿇고 경배해야 할 것입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2015년 12월 25일 금요일


로마 황제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 전체에 호적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로서는 군대 징집과 세금 확보를 위한 것이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의 성취를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마침내 마리아는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에서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가장 낮고 천한 곳에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것은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던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늘에서 수많은 천사들이 거창하게 찬양하고 축하하는 메시아의 탄생은,

이 땅에서는 담요에 쌓여 구유에 누운 아기를 가난한 목자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같은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무엇보다 먼저 오늘날 교회가 지닌 화려함에 대해,

그리고 높고 고귀한 자리에 올라가려고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그로 말미암는 상황의 역전은

우리 자신에게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약함으로 다른 사람이 강해지고, 우리의 낮아짐으로 다른 사람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엔 영광이요 땅엔 평화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 (2017년 12월 25일 월요일) (누가 2:8~20)


불의한 세상은 언제나 사람을 차별하고 나눕니다.

지금도 출신지와 피부색으로, 학벌과 경제력으로 사람과 사람을 분리합니다.

이런 세상이 만든 ‘복음’은 과거나 지금이나 언제나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음입니다.

소수의 권력자들은 자신의 복음을 자랑하며, 자신과 같이 되기 위해서 쉼 없이 싸우고 경쟁하라고 권합니다. 그 결과 나의 복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고통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모든 사람을 향한 복음이자, 대가 없이 주시는 복음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더 많이 복을 받은 사람도, 더 적게 복을 받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의 복음은 곧 다른 지체의 복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만든 가짜 복음이 아닌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진짜 복음을 온 마음으로 받아 누립시다.



1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것이 무엇입니까?

5 아기 예수님께서 구유에 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눕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람들의 어떤 마음을 읽을 수 있나요?

5 나의 삶과 예배에는 구원에 대한 진정한 기쁨과 감사가 담겨 있나요?


보이는 세상의 힘에 압도당해 신앙을 부인하지 않게 지켜주십시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우리와 세상의 결핍을 채워주십시오.


이 땅에 아들을 보내시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늘 그 감격 속에 살게 하시며 이 소식을 전하는 사람 되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