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브리서]

[20]심판의 경고와 구원의 약속 (히 10:26~39) (CBS)

colorprom 2017. 3. 28. 14:09

심판의 경고와 구원의 약속 2014년 5월 23일 금요일


히브리서 10:26~10:39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26절):

‘짐짓’은 ‘속마음이나 본뜻은 그렇지 않으나 일부러 그렇게’라는 뜻이다.

고의로(deliberately, ESV)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일부러 죄를 짓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물론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에도 죄를 지을 수 있고, 그 죄들은 용서 받을 수 있다(요일 2장 1~2절).

하지만 고의로 죄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희생과 관련 없이 심판을 두려워하게 된다.


폐한(28절): 법이나 사람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이다.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29절):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무시하는 행위는

옛 언약을 어기는 그 어떤 죄보다 심각하고 가증스런 것이다.

게다가 의도적이고 고의성이 있는 것이라면

실수로 인해 저지른 죄와는 구별되어 그 형벌은 더욱 막중할 것이다.

이것은 민수기 15:25-31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35절):

‘담대함’믿음의 다른 표현으로, 확신이라 번역할 수도 있다. 또한 ‘인내’의 의미로도 제시된다(26절).

믿음으로 인내하는 사람에게 큰 상이 준비되어있다.

‘큰 상’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에게 약속 된 구원이다(10장 39절).


심판의 경고와 구원의 약속 2014년 5월 23일 금요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드리신 ‘완성된 제사’와

다시 오셔서 베푸실 구원 사이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경고와 약속입니다.

핵심 권면은 ‘담대함’을 가지고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심판과 구원을 베푸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 약속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 역사합니다.

구원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은, 닥칠 심판을 두려워하며 기다리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고, 새 언약을 부정하는 믿음입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현재의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특히나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을 잘 인내했던 과거의 경험은

눈 앞에 닥친 어려움을 이겨내는 촉매제 역할을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도 유사합니다.

지금 마주한 상황들을 돌파할 때, 이전에 믿음으로 선택했던 경험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소소한 믿음의 선택들을 연습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연습한 작은 믿음의 걸음들이 우리의 일생이 되고, 믿음의 발자욱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의 선택, 믿음의 행동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요?

믿음은 우리 안에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요?


믿음을 상황을 판단하는 자기 확신이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자기확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보상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따라 묵묵히 발걸음을 옮길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선택과 발걸음을 신뢰해야 한다면, 꼼짝달싹도 못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소망,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 묵상해 봅시다.

그리고 우리가 소유한 믿음과 소망이 이끄는 방향이 어디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다시 오실 예수님 2014년 5월 23일 금요일


오늘 본문은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 예수님만을 주로 고백하고

또 생명에 이르는 길을 얻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그것을 의도적으로 부인하고 죄의 길로 다시 돌아서려는 자들에 대해 경고하는 것입니다.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또는 고의로 죄를 짓는 것에 대해서는

은혜의 하나님께서도 죄 없다고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자신의 믿음을 살핌으로써

세상의 어떠한 유혹과 거짓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세워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우리를 유혹하고 속이는 것들이 매우 많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을 모두 동원해

자기가 제시하는 삶의 가치와 행복이 성경이 제시하는 삶의 가치와 행복보다 훨씬 좋다고 주장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나라에서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주어질 것을 알면서도

세상이 제시하는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더 키우고 그 사랑에 근거해

세상의 가치와 행복이 아닌 성경의 가치와 행복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오셔서 더 크고 풍성한 것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도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지킨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내가 필요함은 (2018년 12월 21일 금요일)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낸 것을 생각하라."(히10:32)

그렇습니다. 히브리서를 받는 '너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던 최초의 시기에 고난과 핍박을 잘 견뎌냈습니다. 이는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본문 36절은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이라고 덧붙입니다.

인내가 '너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덕목이라는 사실을 새삼 강조합니다.


아울러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들이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며,(히10:33)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하였다"는 사실을 환기합니다.(히10:34)


그런데 '너희'들이 갇힌 자를 동정하며 잘 돌보았던 이유는

그들이 동일한 고난과 박해를 이전에 당해봤기 때문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들이 그리 할 수 있었던 까닭을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히10:34)


당시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는 것은 자칫 갇힌 자와 동일한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 기자에서 '너희'로 불리우던 그리스도인들은 갇힌 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갇힌 자들을 돌보는 이유, 동기는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음'에 대한 앎입니다. 하나님의 "큰 상"을 향한 믿음입니다.(히10:35)


인내는 미련하게 꾸역꾸역 참는 게 아닙니다. 믿음의 소산입니다.


+ 하나님, 우리가 인내할 수 있도록 믿음 더욱 주소서. 아멘.



두려움 (2019년 9월 19일 목요일) (26~31)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늘 우리를 사랑하시며 돌보시는 좋은 분이십니다.

종종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절대자는 싼타클로스 할아버지나 이웃집 할아버지와 같은 이미지로 등장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할아버지 이미지 이상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모든 일에 늘 웃으시고, 뭐든 괜찮다고 하시며 적당히 넘어가주는 분으로만 여긴다면

하나님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없이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지만,

동시에 죄에 대해서는, 아들을 내어주실 정도로 ‘엄격’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을 분명히 경고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삯으로 흘리신 피를 부인하고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은 너무나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일입니다.(히10:29)

감히 누가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을 때 살아남을 수가 있겠습니까?(히10:31)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할 때 거기엔 푸근함은 물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감이 반드시 포함되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죄를 멀리하는 것,

이것이 믿는 자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어긴 사람도 두세 증인의 증언이 있으면 가차없이 사형을 받는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해준 언약의 피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모욕한 사람은, 얼마나 더 무서운 벌을 받아야 하겠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히10:28-29, 새번역)


+ 주님, 매순간 하나님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바라보게 하시고, 죄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담대함 (2019년 9월 20일 금요일) (32~39)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의 면제를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기쁨으로 고난을 이기며 주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세상이 우리의 전부가 아닌 것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태양을 본 사람은 촛불에 만족하고 살 수가 없지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놀라운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이 세상의 것을 전부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더 낫고 영구한 소유임을 알려줍니다.


현재의 고난이 길어 보이고 미래의 약속은 불확실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럴때일수록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내야 합니다.

믿는 자들은 아직 오지 않은 불확실성에 대해 미리 걱정하고 지레 주눅들어 현재를 희생시키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담대함인내를 갖추어, 잠시 잠깐 후에 오실 이를 기다리라고 가르쳐주십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은 고난 앞에서 낙심하고 뒤로 물러나 도망할 자들이 아닙니다.

가장 연약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영혼의 구원이라는 선물을 안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미 견디어낸 고난을 생각하면서 담대함을 버리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오늘 하루도 함께하심을 믿고 담대히 삽시다.


+ 하나님, 세상도 아니고 상황도 아니고 믿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게 하소서. 아멘.


1 본문의 내용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수신자들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5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1 비방과 환난을 이기고 갇힌 자를 동정하고 심지어 소유를 빼앗긴 것에도 기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5 지금 내가 마음을 빼앗긴 세상의 가치와 행복은 무엇인가요?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약속을 소망함으로써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결국 없어지고 말 이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오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 소망을 가지고 성경의 가치와 행복을 추구하는 자가 되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