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2017년 3월 18일 토요일
사도행전 21:37~22:11
37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8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39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1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2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있는 자라
4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6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0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11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성경 길라잡이
애굽인(38절): 이 이집트인은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2.13.5)와 유대고대사(20.8.6)에 나타난다.
벨릭스(23장 24절~24장 27절) 때에 사람들을 모아 예루살렘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로마군이 공격을 받고 400명이 죽고 200명이 포로가 되는데, 그는 도망을 가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39절):
바울의 고향인 다소는 헬레니즘, 수사학, 그리고 스토아 철학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에베소와 서머나와 함께 소아시아의 남쪽 해안의 세개의 큰 도시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다소가 작은 도시가 아니라고 소개하면서 자신이 문화의 혜택을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밝힌다.
그가 헬라어를 말하는 이유이며 이것은 로마에 해가 되는 사람이 아닌 것을 밝히는 말이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2017년 3월 18일 토요일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처음으로 자신을 변호하는 부분입니다.
자신은 다소에서 자란 지식인이며, 가말리엘 문하의 율법에 정통한 자며,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께 열심을 가졌다고 강조합니다.
이 강조점은 아나니아를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22장 12절)이라고 표현한 것과 상통합니다.
그의 소명은 유대인의 신앙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는 변호입니다.
9장과 비교하면, 다메섹의 사건은 회심보다 소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큰 빛으로 영광스럽게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설명합니다.
우리의 소명은 무엇을 기반으로 합니까? 누구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까?
죽음의 길이 살림의 길로 2015년 8월 14일 금요일
우리 주위에서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사건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격려와 칭찬만 하기에도 짧은 인생인데 비난과 정죄를 즐기는( ? )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작심하고 그러는 사람들도 있지만, 무심코 그러는 경우도 있습니다.
장난으로 돌멩이를 발로 찼는데, 그 돌에 맞아 개구리가 죽는 격이죠.
그럴 때는 "모르고 그랬다"가, 핑계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고, 헬라어를 말할 줄 알았으며,(행 21: 37)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엘리트'였습니다.
그는 이른바 엘리트로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는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물론 이 경우는 그가 엘리트였기 때문에, "모르고 그랬다"라고 핑계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모르고 그랬다"에 해당됩니다.
바울은 엘리트였지만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는 지식과 학식의 차원에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의 차원에 놓여있습니다.
엘리트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빛'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이 갑자기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니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식도 학식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고, 그는 믿음의 차원을 알게 되었습니다.
엘리트 바울이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다메섹으로 향하는 길이, 죽음의 길에서 살림의 길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까?
묵상질문
1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시거나 명하시나요?
5 오늘 본문과 함께 고린도전서 4장 말씀을 묵상해봅시다.
3 우리 교회는 오늘 말씀에 어떻게 순종할 수 있을까요?
기도
오늘 묵상한 것에서 기도제목을 찾고, 한 줄 기도문을 작성하여 기도합시다.
빛 되신 주님께 집중하게 하소서.
귀기울여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아멘.
고전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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