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

[34]영혼과 물질에 대한 관심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롬 15:22~33) (CBS)

colorprom 2016. 12. 18. 16:12

영혼과 물질에 대한 관심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2013년 7월 11일 목요일



로마서 15:22~15:33           


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 이는 마게도냐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 하였음이라

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29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1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성경 길라잡이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24절):

이 구절은 바울 사도가 로마교회를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써,

스페인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는 것과 함께

선교여행을 위한 물질적인 지원을 기대하며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26~27절):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고린도전서(16장 1~4절)와 고린도후서(8~9장)에 잘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 안에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서로 어울리는,

교제에 대한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바울 사도이방교회의 구제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교회를 직접 방문하는 것은

영적인 빚을 갚는 하나의 방법이면서,

동시에 유대인이 주를 이루는 교회와 이방인이 주를 이루는 교회 사이의 유대 관계를 든든하게 세우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섬기는 것(27절):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바울이 이 연보를 제사의 행위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16절에서 바울이 언급하는 제사장의 일과 동일한 어근이다.

이는 갈라디아서에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바울바나바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달라는 요청과 비교해 볼 수 있다(행 11장 27~30절).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29절):

충만함은 로마교회에서 바울이 함께하게 될 복이 매우 크다는 것을 강조하는 언어이다.

그리고 이것은 로마서 1장에 나타나는 대로 상호적인 복이다(1장 12절).

이것은 예루살렘교회를 섬기고자 하는 바울의 연보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후 9장 5~6절).



영혼과 물질에 대한 관심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2013년 7월 11일 목요일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나라가 확장되는 일에는 영적인 차원과 물질적인 차원이 조화롭게 짝을 이룹니다. 이방교회는 예루살렘교회로부터 복음 전파의 영적인 빚을 지고,

예루살렘교회는 이방교회가 제공하는 물질의 도움을 받는 과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된 교회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로마교회에 영적 교제와 물질적 후원을 기대하는 바울 사도의 요청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요.

영적 영역뿐 아니라 물적 영역까지 포괄하는 복음의 총체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복지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은,

그만큼 빈부격차가 심화되어 양극화로 인한 소외와 갈등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반증이겠지요.

잘 나누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나누지 못하는 것은 나눌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눌 능력이 결핍된 까닭이라지요.


물질적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아

자녀들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부모들의 비극적인 행렬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들의 영혼이 메말라서라고 너무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먹을 것이 없고, 살 집이 없고, 교육시킬 능력이 없어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실을 먼저 봐야 합니다.


그들의 주위에도 교회가 많이 있었을 텐데요. 나눌 것이 없을 만큼 가난한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까요.

국가가 복지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든,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자들이 가장 쉽게 기댈 수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줘야 마땅하겠지요.


우리 사회는 나누는 능력보다는 더 많이 가지는 능력을 생존을 위한 철칙으로 강요합니다.

교회가 닮아서는 안 될 일지요.

복음에는 사람을 총체적으로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 교회 사이의 나눔이,

그리고 로마 교회를 향한 바울 사도의 기대가 그러합니다.


영혼 없는 물질의 교류가 맹목적이라면, 물질 없는 영혼의 나눔은 공허합니다.

이 둘의 뗄 수 없는 관계를 기억하면서, 자신의 관계망을 돌아보며 성찰하는 하루가 되십시오.


서바나로 가리라 (2017년 10월 24일 화요일)


바울은 이방인 교회들의 연보로 예루살렘 성도 중의 가난한 자들을 섬길 것이라고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가난의 문제를 다루는 연보의 사용을 넘어섭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한 교회의 구성원이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은혜에 참여했기 때문에

물질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연보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 임무를 잘 마치고 로마교회로 가는 것은

스페인(서바나)으로 가고자 하는 바울의 의지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는 로마교회가 자신의 스페인 사역에 도움이 될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요청합니다.

바울은 부르심의 목적과 그 이상을 따라 살아가고 행동합니다.

자신의 이방인들에 대한 사역이 하나의 교회라는 열매를 맺고

또 스페인으로 그 이방인 사역을 위해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기도-화해로 나아가는 길 (2018년 7월 31일 화요일)


우리의 기도는 때때로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공예배 기도에서, 자기 삶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자기합리화 내용을 다른 이들에게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자신들 일행이 모금에 관하여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고 자랑하였다고 밝힌 다음, 자신의 염려를 전달한 바 있습니다.

마게도냐 사람들이 거기에 바울과 함께 갔을 때 혹 준비되지 않은 것을 보게 되면 어떡하나,

세심하게 염려하였던 것이지요. (고후9:4)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구제금이 그곳 성도들에게 기쁘게 받아들여지도록

기도해주십시오"라고 부탁하면서,(롬15:31, 새번역) 성도들 사이의 일치와 화해를 강조합니다.

바울옳은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조차 혹 사람들 사이에 오해가 빚어질세라

그것에 마음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여러분에게로 가서, 여러분과 함께 즐겁게 쉴 수 있게 되도록"

기도해달라고도 부탁합니다.(롬15:32, 새번역)


모쪼록 우리도 믿음의 이웃에게 겸허히 기도를 부탁하는 바울처럼

'이웃과 함께하는' 상황을 언제나 염려하며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기 바랍니다.

이웃의 마음을 염려하고, 함께 즐겁게 쉬자는 기도를 드릴 수 있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일 것입니다.


+ 하나님, 우리가 화해와 일치를 누릴 수 있게 하소서. 아멘


묵상질문


바울 사도가 서바나(스페인)로 가는 중에 로마교회를 들리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기도


예루살렘교회와 이방교회 사이의 아름다운 교류를 기억하는 이 땅의 교회들이 되게 하소서.


영혼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는 추상적인 신앙을 넘어,

현실에서 고통 받는 이웃을 향한 실제적인 사랑을 베푸는 신앙을 갖추어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