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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고 (롬 6:1~14) (CBS)

colorprom 2016. 12. 14. 13:49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고 2013년 6월 15일 토요일


로마서 6:1~6:14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성경 길라잡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1절):

삼위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확실성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발견되는 죄에 관한 의문이 생긴다.

여전히 남아 있는 죄가 구원의 여정을 방해하고 그리스도인을 넘어뜨리는 것은 아닌가?

이에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구원은 죄의 형벌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칭의)뿐 아니라

죄의 세력으로부터도 건짐을 받는 것(성화)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무기력하게 죄 아래 거할 수 없다(1~2절).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2절):

바울사도는 믿는 자들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로 세례를 언급한다.

세례는 물에 잠기는 의식으로서 죽음을 상징한다.

곧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죄와의 관계를 단절하게 되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3절):

3절부터 5절까지는 우리가 어떻게 죄의 폭압으로부터 건짐을 받았는지 세례를 통해 알려준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죄의 지배에서 해방되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을 받았다.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수단이다.

이어지는 6절부터 7절까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8절부터 10절까지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므로 너희는(12절): 12절부터 14절까지는 1절부터 11절까지의 요약과 적용이다.

1절부터 11절까지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정체성의 변화를 소개하고,

12절부터 14절까지는 변화된 정체성에 합당한 삶을 촉구한다.

새로운 삶은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에서 가능하다.

정체성의 변화는 하나님 홀로 행하신 사건이다.

하지만 삶의 변화는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결단과 헌신을 요구한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3절):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며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전 존재를 죄에게 내어주어 악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목적에 맞게 사용되도록 하라는 의미다.


또한 너희 지체를(13절): 지체, 즉 죽을 몸(12절)은 죄가 신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이다.

이점에서 기독교 윤리에서 몸은 신앙의 중요한 과제이다.

고라 자손은 마음뿐 아니라 그들의 육체도 하나님을 향해 반응한다고 고백했다(시 84편 2절).

따라서 성화의 여정은 마음과 몸,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전인이 모두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14절): ‘못하리니’는 미래 시제로,

죄가 어느 한 순간도 우리를 다시 지배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고 2013년 6월 15일 토요일


우리 인생은 그리스도와 함께해 온 인생입니다.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분과 함께 죽었으며,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로 여기며 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삶을 억압하는 실체인 죄에게 종노릇하던 상황으로부터 해방되어,

은혜의 다스림 가운데 살아가는 은혜의 사람임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인간의 선한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주장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한다는 터무니없는 논리와 닮았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현실에서 죄의 종노릇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이런 속물근성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은

상징적 의미가 아닌 실제의 사건입니다.

일상이 은혜로 호흡하며 사는 공간이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드러내신 올바른 행위의 기준인 의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추상적이거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가운데 나타나는 구체적인 행위로 우리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합니다.


각 사람을 그 행위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은혜 가운데 있다고 고백하면서도 육체의 썩어 없어질 것을 욕망하며 살아가는 속물이어서는 곤란합니다.

은혜 아래 살아가는 자다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지체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지 않는 믿음에 대한 경고입니다.

죄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사는, 삶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생활을 하십시오.


목적 2015년 10월 9일 금요일 (롬 6:4~14)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나는 나름대로 바르게 살았는데 내가 왜 죄인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모두 '죄'를 지을 가능성을 갖고 태어납니다.

아담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로

모든 사람은 악의 속성, 죄지을 잠재성을 지닌 채 태어납니다. 그것이 원죄입니다.

 

원죄는 인간의 노력으로 없앨 수 없습니다.

많은 종교가 수천 년 동안 그 죄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을 찾아 헤맸지만

'속죄'의 방법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스스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내려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돌아가셨습니다.

이를 '믿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구원받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가르쳐주셨습니다.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시며,

때로는 가르치시고 때로는 시범 보이시고 때로는 제자들을 시험하시며 자세히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경을 통해 배웁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역시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사탄의 유혹을 인간의 힘으로 막아보려는 것은 역부족입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해낼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움을 구합시다.


신분에서 수준으로 (2017년 9월 20일 수요일)


구원은 한 시점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 평생에 걸친 긴 과정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고, 신분이 바뀌는 것(칭의)은 구원의 시작일 뿐 끝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저 신분이 바뀐 것으로만 만족을 하고, 더 이상 성장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개인의 삶뿐 아니라 공동체의 삶에 심각한 방종과 도덕적 부패가 발생했고,

하나님의 이름까지 더럽혀졌습니다.


태어난 생명이 힘차게 자라나듯이, 신분이 바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성화).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토대를 통해 우리의 수준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며, 지금도 이루어져 가는 것이며, 장차 이루어질 것임을 기억하며

수준을 높여 갑시다.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삶 (2017년 9월 21일 목요일)


세상은 행동을 변화시킴으로써 정체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물론 그들이 가진 학문과 지혜로, 하나의 행동과 습관은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죄를 사랑하는 성향 자체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부분적인 개선이 아니라

하나님께 반응하는 새로운 본성, 즉 거듭남입니다.


바로 이 일을 삼위 하나님께서 홀로 행하셨습니다.

새로운 삶으로의 요청인 기독교 윤리는 돌이킬 수 없는 이 사건 위에서 시작합니다(11절).

그리고 그 마지막은 너무나 확고한 승리의 선언입니다(14절).


이제 남은 것은 새로운 정체성에 관한 확고한 믿음새로운 삶을 향한 결연한 의지입니다.

마음뿐 아니라 몸까지 하나님을 향해 반응하는 성화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갑시다.


묵상질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기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 존재로서의 의미를 잘 찾아 지켜 가게 하소서.
은혜를 말하면서도 육체의 욕망을 좇아 살아가는 속물근성을 버릴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주소서.


성령의 능력을 충만하게 받아 성화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