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

[14]율법으로부터 해방 된 삶을 삽니다 (롬 7:1~13) (CBS)

colorprom 2016. 12. 14. 14:09

율법으로부터 해방 된 삶을 삽니다 2013년 6월 18일 화요일


로마서 7:1~7:13           


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성경 길라잡이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1절):

바울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여정에서 등장한 두 가지 문제를 6장과 7장에서 진술한다.

6장에서 의 문제를 다루었다면, 7장에서는 율법의 문제를 언급한다.

법, 특히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율법의 관계를 해명해야 했다.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4절):

‘그리스도의 몸’은 율법의 저주가 요구한 고난과 죽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죄의 세력에서 놓임을 받았듯이(6장 10절),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죄와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셨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

이렇게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목적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5절): 5절은 죄와 율법의 관계를 자세히 밝힌다.

율법 자체는 거룩한 것이지만, 옛 시대의 사람들은 율법에 순종할 능력은 없었다.

그 결과 율법을 통해 죄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고, 죄를 향한 욕망은 더욱 거세어졌다.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6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임하였고,

그 결과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율법 조문의 묵은 것에 얽매여 살았던 바리새인과 같은 외식의 삶을 청산할 수 있게 되었다.


율법이 죄냐(7절):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율법이 도리어 사람에게 저주가 되었다는 역설을 해명해야 했다.

어떤 이들이 율법 자체가 악한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바울율법이 산출하는 부정적인 결과들은 율법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죄의 세력과 사람의 연약함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 결과,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한다.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8절): 는 율법의 특정한 요구를 발판으로 악한 활동을 시작한다.

죄인의 반항적인 성품은 하나님의 법이 금하는 것에 더욱 강하게 이끌린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께서 금하는 것에 더욱 이끌리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한편,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는 것은

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활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역설적으로 율법이 오면 죄가 왕성하게 활동하여 사람을 압도한다.


율법으로부터 해방 된 삶을 삽니다 2013년 6월 18일 화요일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순종의 삶을 위해 힘씁니다.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하는 죄의 정욕을 버리고 율법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삶을 사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처럼 율법 조문의 묵은 것에만 집착하여 살려는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하나님의 지배로 말미암아 근본적으로 마음이 변화하여 새로운 세계를 사는 사람입니다.

교리는 생존을 위해 너무 쉽게 세상과 타협한 속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은밀한 의구심과 그 죄책감을 일깨우는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리 그 자체가 우리의 삶을 선한 방향을 향해 실천적으로 움직이도록 이끄는 것은 아닐 터입니다. 성령하나님의 지배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 속에서 살아갈 때에야

비로소 선한 삶이 가능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근원적 차원에서 변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율법 조문의 묵은 것에 매여 죄의 종노릇하며 살았던 바리새인과 같은 실패를 반복하는

‘21세기의 그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과 일상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주신 것들을 잘못 이해하여

본래의 의도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경우가 많았음을 봅니다.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주어진 계명을 통해 죄가 개입하여 우리 인간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었다는

바울의 역설적 논리를 기억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옛 삶에 얽매이게 하는 율법과 결별한 존재답게 오늘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율법의 길? 아니 은혜의 길! (2017년 7월 20일 목요일) (롬 7:1~6)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크고작은 여러 법규와 규범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는 교칙의 지배를 받고, 직장에 다니고 있을 때는 직장의 내규 같은 것에 지배를 받습니다. 가정에도 암묵적인 가훈이 있으며, 교회에도 교회법이 있고 나라에는 헌법이 있어 질서를 조절합니다.


이보다 한 차원 높은, 아니 한 차원 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사람의 내면에 있는 양심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높고 깊은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 법을 가리켜 성경은 '율법'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선하고 완전하고 의로우며 거룩하고 영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을 대할 때면 언제나 고통스럽습니다.

율법이 어딘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율법을 지키기에 턱없이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비추어보면 우리는 언제나 범법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절망해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분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율법의 마침이요 완성자이신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율법 때문에 절망하지 않을 수 있고, 율법을 지키는 체하는 위선자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은혜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은혜의 길로 들어서야 우리는 삽니다. 우리 모두 매일같이 은혜의 길로 새롭게 들어섭시다.


죽음은 새로운 삶의 토대입니다 (2017년 9월 23일 토요일)


세상은 죽음이 생명의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죽음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음을 피하려하면 할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점점 더 강하게 지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영생은 역설적으로 죽음을 딛고 일어난 부활의 생명입니다.

죽음을 정면으로 통과함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는 삶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율법 앞에서 우리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을,

너무나 선명한 죄를 향한 갈망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스럽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만 자기죽음, 즉 자기부인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기력함을 인정하는 것은 생명의 끝이 아니라 생명의 시작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부정할 수 없는 삶의 기준 (2017년 9월 25일 월요일)


언어는 소통의 수단을 넘어 사고와 생각을 규정하는 틀이기도 합니다.

이점에서 자신을 지독히도 사랑하는 현대인들은 더 이상 ‘죄’라는 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환경과 상황의 부산물이며, 절대적인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어설픈 자기사랑 아래에 숨은 는 더욱 깊어지고 은밀해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시대와 사람 앞에 율법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합니다.

수면 아래에 숨은 죄를 꺼내어 ‘’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외면할 수 있는 진실을 드러냅니다.

그 출발점은 환경을 핑계하지 않고 율법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일입니다.


율법은 그저 과거의 유물이 아닌 바로 지금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드러내는 삶의 기준입니다.

율법 앞에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냅시다.


묵상질문


혼인 관계라는 비유적 설명을 통해 율법과 죄에 대해 설명하는 바울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죄로부터의 해방과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기도


죄 아래 살아가는 삶의 잔재를 청산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살도록 하는 힘을 의지하며 살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을 잘못 사용하여

스스로를 사탄의 지배 아래 넘겨주는 실패를 더 이상 반복하지 않게 하소서.


자비로우신 하나님! 율법의 종 노릇하지 말고 은혜의 보좌 안에 들어가 생명을 노래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