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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아담의 그늘 아래 있는 ‘나’라는 존재의 비참함 (롬 7:14~25) (CBS)

colorprom 2016. 12. 14. 14:18

아담의 그늘 아래 있는 ‘나’라는 존재의 비참함 2013년 6월 19일 수요일


로마서 7:14~7:25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성경 길라잡이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14절):

율법이 선한 것임에 반해 그것을 받은 이스라엘은 육신에 매인 존재로서 죄의 종이 되었다는 의미다.

즉, 첫 사람 아담의 그늘 아래 있는 인간 존재의 비참함을 표현한 것이다.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옛 시대, 옛 약속에 속한 삶이며, 타락의 결과인 것이다.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7, 20절):

바울사도는 죄를 의인화하여 인간의 배후에서 악을 행하도록 조종하는 세력으로 묘사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바울의 이 탄식 속에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

전 존재가 비참함에 처한 인간 본연의 모습이 나타남과 함께, 구원에 대한 간절함이 묻어 있다.


14절부터 25절까지에서 등장하는 ‘나’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입장이 있다.


첫째, ‘나’는 과거 율법에 투철했던 바울의 경험을 빌어 중생하지 않은 유대인의 입장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입장의 근거는 ‘죄 아래’(14절), ‘죄의 법의 포로’(새번역, 23절) 같은 ‘나’에 대한 부정적 진술이

6장에서 소개한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모순된다는 것이다.


둘째, ‘나’는 바울의 현재 상황, 즉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입장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본문의 시제가 현재이며(17절),

죄에 대한 깊은 각성과 긴장은 오히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증거라는 것이다.


첫째 입장이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해석인 반면,

둘째 입장은 어거스틴루터, 칼빈이 동의했던 오래된 해석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절):

25절 전반부는 24절에 등장한 탄식에 대한 답변이다.

한편 25절 후반부는 14절부터 25절까지를 전체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아담의 그늘 아래 있는 ‘나’라는 존재의 비참함 2013년 6월 19일 수요일


바울사도는 율법을 가졌으나 그것을 실천해 낼 수 없었던 유대인이라는 존재의 비참함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처할 수 있는 상황임을 경고하듯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자 하지만 지킬 수 없는 ‘나’,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유로운 삶을 상실한 채 죄가 지배하는 ‘나’라는 존재의 비참함이

본문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음(이성)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기 원하지만 실제 행동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는

자아 분열과 모순의 양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나라 백성이라는 주체성이 흔들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지만, 행동으로는 악의 세력을 대변하는 일종의 분열증입니다.

심지어는 행동해야 함을 알면서도 더욱 행동하지 않습니다. 실천적 삶의 상실, 즉 윤리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할 수 있음을

바울사도는 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문제의 핵심은 율법이 아니라 내 속의 죄에 있다고 바울사도는 지적합니다.

아담의 그늘 아래 있는 ‘나’라는 존재가 처해 있는 비참한 현실인 것이지요.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의 주체성을 상실함으로써 비참한 상황에 처한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순종의 삶을 사는 실천적 제자도만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한다 (2017년 7월 21일 금요일) (롬 7:7~20)


인간은 인간이라서 인간적인 고민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아하고 고차원적인 고민 같다고 생각될지라도 털어놓고 나면 결국 인간적인 고민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고상한 언어로 표현하든, 바로 인간의 '죄 된 본성'에 연결되어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실존적' 고민을 깜짝 놀랄 정도로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롬7:15-17, 새번역)


이미 사도 바울은 어느 정도 위대한 사도로 존경받게 된 시점입니다.

어쩌면 바울을 직접 대면하지 못한 로마 교인들조차 그를 위대한 사도로 높이 존경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솔직해야 했을까, 의아할 정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죄가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다른 인간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사도일지라도 자신 또한 인간적 고민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고민, 인간의 본성인 를 솔직히 인정하며 하나님만을 증거하기에,

사도 바울은 진정 위대한 사도입니다.


치열한 싸움, 깊은 탄식 (2017년 9월 26일 화요일)


육신의 욕망을 자극하는 죄는 도덕적으로는 악하지만, 미적으로는 아름답습니다.

사람은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죄의 유혹에 너무 쉽게 굴복하는 이들은 역설적으로 죄의 무서움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죄의 유혹과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은 죄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 것인지 알게 됩니다.

유혹과 맞서는 싸움의 강도가 은혜와 복음에 대한 태도를 결정합니다.


죄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이들, 즉 유혹 앞에서 너무 쉽게 굴복한 이들은

은혜도 하찮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운 이들은 복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압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몇 마디의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셔야 했음을 기억합시다.


분열을 경험하는 신앙 (2018년 7월 6일 금요일)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 (…)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롬7:24-25, 새번역)


바울 자기 안의 '분열'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의 신앙이 흔들리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고백을 바울의 ‘한계’로 읽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신앙인의 중요한 '특징'에 주목해보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흔들림 하나 없이 확고부동하게 교리를 받아들이고 추종하는 자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인간의 믿음은, 하나님의 법죄의 법모순을 자기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 철저히 인식할 때

흔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흔들림 없는 확고부동함은, 떨림 없이 북극을 가리키는 나침반처럼 죽어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에만 전적으로 기대어 살아가려는 신앙인은,

자기 삶에서 두 법의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은 자연스럽게 일치되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라는 바울의 탄식은

믿음에 실패한 나약한 자의 하소연이 아닙니다.

매순간 철저히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의 '열정적 표현', 흔들림을 매순간 초월하겠다는 '신앙적 다짐'입니다.


+ 하나님, 분열을 경험하는 신앙을 갖게 하소서. 아멘.


모순덩어리 (2019년 8월 8일 목요일)

범죄와 악행이 단지 건달들에게나 해당하는 일은 아닙니다.


시편의 한 시인은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고 탄식하였습니다.(시14:3)


사도 바울'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있다'고 말씀합니다.(롬3:23)
지나친 과장이 아닙니다.


심지어 '사랑의 성자'로 알려져있는 손양원 목사조차 아들에게 보낸 옥중편지에서

"나는 지금 어릴 때 몸에 밴 죄악과 아직도 싸우고있다"고 고백한 바 있지요.


모든 사람은 그 내면에서 선악의 치열한 쟁투를 겪게 마련입니다.

착한 마음으로만 가득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무엇이 선한 일인 줄 알면서도 정욕과 탐심 따위에 이끌려 ‘원치 않는 악행’을 저지르곤 합니다.


다들 마음으로는 선한 일을 좋아하고 동의합니다.

하지만 당장의 불이익, 불편, 성가심, 혹은 오랜 삶의 나쁜 습성 때문에

선뜻 선행을 실천하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으로 속사람이 나뉘어 날마다 갈등하는 '비참한 인생'을 건질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분만이 죄의 법에서 풀려나 죽음을 이기셨고, 그 능력으로 모순덩어리 인간을 다듬어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세우실 수 있기 때입니다.(빌2:15)


+ 하나님, 불이익이 있더라도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용기를 주소서. 아멘.


묵상질문


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게 되는 근원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죄의 지배 아래 놓인 ‘나’라는 존재의 비참함에 대해 바울사도는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기도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의 힘을 의지함으로써 죄의 종노릇하는 비참한 현실을 깊이 깨닫게 하소서.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실천하는 제자로 살게 하소서.

자비로우신 하나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손과 순종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