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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하나님께서 변화의 시작이십니다 (슥 8:1~13) (CBS)

colorprom 2016. 4. 19. 16:38

[13]하나님께서 변화의 시작이십니다 2016년 4월 18일 월요일

 

스가랴 8:1~8:13

 

1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2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3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4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5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

 

6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7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8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성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있었던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 날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

10 이 날 전에는 사람도 삯을 얻지 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 못하였으며

사람이 원수로 말미암아 평안히 출입하지 못하였으나 내가 모든 사람을 서로 풀어 주게 하였느니라

 

11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는 내가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옛날과 같이 아니할 것인즉

12 곧 평강의 씨앗을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

 

13 유다 족속아,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방인 가운데에서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가 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

 

 

성경 길라잡이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1절):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언약 백성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묘사하신다. 한 배우자가 다른 이를 연모할 때, 남은 배우자가 느끼는 질투는 사랑의 다른 모습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큰 질투는 그만큼이나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한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로 돌아오셔서 함께 거하실 것이다(3, 8절).

 

길거리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않을 것이라(4절):

나이 많은 노인들이 길거리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쉰다는 것은 나라에 전쟁이 그친 평안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 성읍 거리에 소년들과 소녀들이 가득하여(5절):

스가랴가 활동하던 시기, 예루살렘 주민들은 고작 수백 명에 불과했다.

거리(광장)는 죽음과 파괴의 자리였다(애 2장 11~12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돌아와 거주하시면 예루살렘은 번성하고, 광장은 기쁨으로 가득할 것이다.
어린이들이 가득하여 뛰논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며 양육한 결과이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아 누림을 상징한다.


만군의 여호와의 집(9절):

당시 건축되던 제2성전을 가리키는데, 이는 그들의 성전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기 위함이다.

곧 성전의 외적인 규모가 화려하고 웅장해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친히 거하시는 상징적 장소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집이라는 것이다.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9,13절):  

‘손을 견고히 하라’는 것은 성전건축에 대한 독려인 동시에,

구약성경에서 ‘거룩한 전쟁’에 참여하라는 권면이다(삿 7장 11절).

언약의 회복을 의미하는 성전건축을 통해 이스라엘은

다시금 풍요로움과 관계의 회복, 즉 ‘샬롬’을 회복할 것이다.

이슬(12절): 강수량이 부족한 팔레스타인에서는

건기에 농작물이나 과실수들은 아침 이슬을 통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슬은 농사에 더 없이 소중한 천혜의 복이었다.

 

묵상과 삶

 

주전 520년의 예루살렘은 고작 수백 명이 거하는 황폐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아직 패전과 멸망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있었습니다.

또한 경제적 어려움과 이웃 세력들과의 훼손된 관계로 말미암아 전쟁 같은 나날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변화의 가능성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절망을 몰아내는 희망의 소식이 들립니다.

크게 사랑하셨기에 크게 질투하셨던 하나님께서,

먼저 언약 백성에게로 돌아와 함께 거하실 것이라는 복음입니다.

생명의 기쁨이 죽음의 기억을 덮을 것이며, 결핍은 충분함으로 채워질 것이며,

단절된 관계는 다시금 이어질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런 변화의 주역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들만이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진정한 변화의 시대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혁신’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가만히 머물러있다가는 도태되고 실패하기에,

하루가 멀다 하고 신기술과 신제품이 자태를 뽐내며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래서 이 땅의 청년들은 매일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직장인들은 자기계발에 온 힘을 다합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변화는 요원합니다.


돌로 사람을 죽인 가인의 후손들은 ‘혁신’을 거듭했지만,

그 결과 칼로, 이후 화포와 첨단 무기로, 그리고 지금은 한 줄의 댓글로 사람을 죽입니다.


하나님 없는 ‘혁신’은 더욱 큰 죽음과 전쟁을 야기했습니다.

죽음의 시대를 종식하는 진정한 변화의 주역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어리석은 ‘혁신’을 중단하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삶으로

 

약속에 있어서는 신뢰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뢰관계의 정도에 따라 그 약속이 지켜질 수 있는가의 여부가 판가름되기 때문입니다.

신뢰도가 높은 사람일수록 그가 한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지만,

신뢰도가 낮은 사람은 그가 한 약속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러한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한 약속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황폐케 된 땅에서 살아가는 유다 백성들을 다시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의 주체가 하나님이신만큼 이 약속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만군의 여호와’라고 반복해서 소개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막을 자가 없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구원을 약속하셨다면, 그것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 구원은 우리의 뜻과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을 넘어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과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소망과 믿음이 지금 여기서 사랑을 실천하게끔 하는 동력입니다.

 

기도무용론은 없다 2016년 11월 16일 수요일


스가랴 8:1~8:17


"그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슥8:6)

이는, 예루살렘 회복의 약속을 선뜻 믿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이상적인 약속이길래 백성들이 기이하게 여기는 마음을 품게 되었을까요?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그 성읍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슥8:4-5)
대단히 거창하다기보다는 다소 소박한 광경입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백성들이 너무 오랫동안 볼 수도 없었고 누릴 수도 없었기에

기이하고 꿈 같은 일로 여겼던 것이지요.

그만큼 백성들의 마음이 위축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의심하거나 위축된 마음을 먹은 사람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아들에 대한 약속에 헛웃음 보인 사라,(창18:14)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오는데 밭을 구입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이 정말인가 되묻는 예레미야,(렘32:27)

성령잉태에 깜짝 놀라는 마리아,(눅1:37)

부자가 구원받기란 매우 어렵겠다며 웅성거리는 제자들….(마19:26)


그들에게 하나님은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라'고 권면하시곤 하셨습니다.


의심되고 위축될 때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래놓고는 '기도해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무용론이 고개를 듭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도무용론이란 없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무용론이란 없습니다.

기도의 결과는 주님께 맡기고, 항상 기도의 자리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묵상질문

 

언약 백성의 비참한 현실은 무엇입니까?(10절)

비참한 현실을 극복하는 변화의 시작은 무엇입니까?(3, 8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언약 백성은 어떤 변화를 맞이합니까?(12, 13절)

하나님께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과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면 어떤 삶을 구상해야 할까요?

 

기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온 힘을 다해 맞이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우리와 가정, 교회와 세상이 진정한 변화를 맞이하게 해주십시오.

 

말씀하신 대로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약속을 소망하면서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세요.


기도무용론(無用論)이 있어 우리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끊임없이 방해합니다.

그러나 기도 없이 살 수 없다는 자세를 가지고 매순간 기도에 힘쓰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