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십자가 2016년 3월 25일 금요일
요한복음 19:17~19:27
17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히브리 말,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18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23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성경 길라잡이
십자가를 지시고(17절):
일반적으로 십자가의 세로목은 처형 장소에 세워놓고, 죄수는 가로목을 지고 갔다.
십자가 위에서 죽는 원인은 출혈, 호흡곤란, 쇼크 등 많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십자가형은 죽음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17절): 히브리말로는 골고다이며, 라틴어로는 갈보리이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19절):
보통 처형될 죄수의 머리 위에 그의 죄목을 써 붙였었는데,
빌라도는 죄목 대신 신분을 표시하는 패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붙이게 했다.
사실 이는 예수님께 처형을 당하실 마땅한 죄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한복음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는 질문으로 시작하지만(요 1장 46절),
나사렛에서 세상을 구원할 다윗의 자손, 유대인의 왕이 나셨다(요 18장 37절).
온 세상을 위로할 참된 왕이시나, 이것이 로마의 평화를 위협했다며 십자가형의 명분이 된다.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20절):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은 성(진) 밖에서 처형했다.
이는 성 안은 정결한 곳이므로 시체와 같이 부정한 것을 성 안에 둘 수 없기 때문이다.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24절):
당시 통으로 짠 옷은 비싼 값에 거래되었기 때문에
군인들이 부수입을 올리기 위해 서로 겉옷을 가지려고 했을 수 있다.
또한 이런 모습은 당시 군인들의 도박을 좋아하는 습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것은 시편 22편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24절, 28절): 십자가형을 당하시면서 받으신 고난과 수치의 길을 구약의 성취로 본다. 옷을 빼앗아 제비 뽑는 일이며(시 22편 18절), 악인의 분노 아래 신포도주를 마시는 것(시 69편 21절)이다.
수치와 고난의 길이 속죄를 위한 메시아의 길이다.
이모(25절):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곧 살로메일 가능성이 많다.
세베대의 두 아들은 야고보와 요한이다. 즉 예수님과 요한은 사촌이다.
예수님께서 왜 사랑하는 제자인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겼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27절):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는 첫 번째 가나의 이적에서 이미 정리되었다(요 2장 4절).
예수님의 죽음이 마리아의 육신의 아들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사랑하사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죽음임을 확인하는 말씀이다.
육신의 어머니를 돌보는 아들은 사랑하는 제자(요한으로 추정)가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2016년 3월 25일 금요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빌라도는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물론 빌라도가 의도하는 바는 유대인들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이러한 칭호가 거슬려 바꾸기를 원하였지만, 빌라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불순한 의도로 기록되었든지 상관없이 예수님께서는 진정 유대인의 왕이자 온 세상의 왕이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명패가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로 기록되었다는 것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 만물을 회복하실 메시아이십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이심을 많은 표적들로 보여주고 있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표적만큼 강렬하고 확실한 표적은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결정체이자, 성경의 요약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놀라운 것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쉽게 적응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 그리스도’는 기독교인들이 늘 자주, 너무나도 익숙하게 사용하는 말들입니다.
너무나도 익숙한 나머지 이러한 단어들 의미들조차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저주 아래서 비참하게 죽어가셨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역설적으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성취되는 곳이며,
죄의 비참과 저주가 아니라 참된 평화와 안식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달리신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를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입버릇처럼 말하는 식상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사랑과 은혜의 표지입니다.
삶으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아집과 증오, 그리고
빌라도의 불공정한 판결과 불법적인 재판과정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죄명을 무엇으로 해야 할 지에 대해 고민하던 빌라도는
결국 ‘유대인이 왕’이라는 패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항의하며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비록 그의 본심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이로써 예수님께서 왕이시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왕이라 하며 내란을 일으키려다 죽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왕이자 구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을 진정한 왕이자 구주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단순히 자신의 소원과 욕망을 이루기 위해,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걱정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믿는 것은
모래 위에 쌓은 집과 같아 언제라도 쉽게 무너집니다.
그와 달리 참된 믿음은 예수님을 삶의 왕이자 구주로 고백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독생자의 대속적인 죽음 2014년 4월 18일 금요일 (요한 19:17~30)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죄패 아래서 십자가형을 받으셨고,
옷을 빼앗기고 신 포도주를 마시는 수치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고난은 메시야의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르십니다.
육신의 아들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짐을 지는 십자가를 통해서
요한이 말하는 생명이 이루어지고 창조가 회복되는 것입니다(요 1장 1~5절).
예수님께서는 홀로 가셔야만 하는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베드로와 같이 죽기를 맹세한 제자도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이렇게 홀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길은
형식적으로 함께 좌우에 못 박힌 두 사람(죄수)도 같이 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모양은 같지만, 그 성격과 본질은 철저히 다릅니다.
무죄함을 세 번이나 확인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단지 억울한 한 사람의 죽음을 넘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입니다.
마리아를 여자라고 함으로써 마리아의 육신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그분만이 질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고난이라는 것 자체를 묵상하는 것보다 더 분명한 적용이 있을까요?
그분께서만이 지신 십자가로 정말 다 이루어졌기에,
우리로서는 더 이루어야 할 것이 없는 온전한 구원 앞에서 내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분을 진정으로 믿는 것입니다.
믿고 그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요 20장 31절).
이 생명은 모든 부족과 결핍을 극복하는 진정한 힘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2018년 5월 26일 토요일)
오늘의 본문은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계실 때, 네 명의 여자들이 그곳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막달라 마리아, 이렇게 네 명이었습니다.
이들은 혈연이나 지연 때문에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곁을 지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의 가족으로서 사랑의 마음으로 그곳에 함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요한이 언급됩니다.
열두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 즉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 있었습니다.(요19:26)
사랑이 곁을 지키게 하는 힘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혈연가족을 우선시하고, 혈연가족을 사랑의 공동체로 여깁니다.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혈연가족이라고 하여 반드시 사랑이 차고 넘치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생성과 전달은 혈연관계 안이라고 해서 더 잘 이룩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이 건강하게 피어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이 건강하게 유지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가 혈연관계의 가족이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게 아닙니다.
(요21:15-19)
물론 가족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그 같은 '큰 사랑'을 목격합니다.
+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묵상질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혹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가 너무 식상하거나 익숙하다고 여기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머리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팻말이 쓰인 것에서 무엇을 알 수 있나요?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임을 믿고 있나요?
기도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시며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또 감사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나로 인한 것임을 믿게 하시고,
이제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임을 선언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세요.
-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게 하시도록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 다원주의로 혼란스러운 세상에서도,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임을 더욱 굳게 믿고 의지하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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