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나라 백성 2016년 3월 23일 수요일
요한복음 18:28~18:40
28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30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1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40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성경 길라잡이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28절): 정결규례에 따르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면 7일 동안 부정해진다.
그러면 곧 있을 유월절에 참여할 수가 없으므로 빌라도가 있는 관정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을 심문하던 유대인들이 정부정의 원리를 지키기 위해서 이방 총독의 관정에 들어가지 못하자,
빌라도가 밖으로 나와서 상황을 파악한다.
정결예식으로 유대사회의 결핍을 해결하지 못하는 무력함을 드러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요 2:6).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31절): 산헤드린 공의회는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다.
이는 로마가 사형집행권을 산헤드린 공의회에 위임할 경우
민족주의적인 공의회가 로마에 협력하는 자들을 제거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분봉왕 아켈라오가 추방당하고 유다가 로마의 속국이 된 후(주후 20년경),
유대 공회는 사형을 집행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공회가 할 수 있는 형벌로는 출교와 매질뿐이었다.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32절):
마태복음 20:19 에 의하면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한다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넘겨지셔서 로마의 평화를 위협한 죄로 고소당하고 계신다.
이후 유대인의 왕이냐는 고소 내용이 이를 뒷받침한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6절):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다. 진리의 나라이다.
이런 증언에 대해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일차로 선고한다(38절).
로마의 평화를 위협하는 유대인의 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39절).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38절):
원어에는 여기서 ‘진리’라는 단어에 정관사가 빠져 있다.
즉 빌라도는 ‘절대적인 진리’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그는 진정한 진리를 찾는 구도자로서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판결해야 할지 몰라 갈등하는 상황에서 한 푸념적인 말일 뿐이었다.
강도(40절): 요세푸스는 이 단어를 열심당의 지도자를 언급할 때 사용하였다.
바라바는 단순한 강도가 아니었다.
그가 비록 살인죄를 지었지만 이스라엘을 위한 애국적 행동이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석방을 요구하였다.
예수 나라 백성 2016년 3월 23일 수요일
만약 예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있는 나라였다면,
애초에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붙잡히시지도, 이 자리에 서계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답변에 대하여 빌라도는 정치적인 무죄를 선언하며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원하지 않고 바라바를 원하였습니다.
바라바는 로마의 지배에 불복종하며 유대의 독립을 꿈꾼 애국자였습니다.
그는 로마에 대항하여 무장 봉기를 도모하다가 붙잡혔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유대인의 왕으로 예수님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바라바처럼 로마에 대항하는 유대 민족주의자에게 더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라바처럼 이 세상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우리의 구원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도 아니고, 이 세상 나라에서 보상을 받는 종교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 나라에서는 고난과 핍박과 환란을 당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환란과 죽음을 당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이 이 세상의 나라에서 복을 받는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육에 속하지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이 세상의 유익들과 타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당장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의와 공평의 문제들을 외면하지는 않습니까?
이 시대에 우리가 당해야 할 고난은
예수님 나라의 가치, 곧 의와 평화의 가치를 추구하자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입니다.
삶으로
빌라도는 총독으로서 예수님을 석방할 수 있는 행정권과 사법권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폭동을 방지하고 자신이 지닌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군중들에게 예수님과 바라바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예수님을 거절하고,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최악의 수를 둔 것이고,
군중들은 오로지 예수님만 거절하면 된다는 생각에 최악의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렇듯 통치자의 불의와 군중들의 무지와 선동 속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누군가의 지시를 받기보다 누군가를 지시할 수 있는 자리에 앉기를 원합니다.
물론 이왕이면 더 힘 있는 자리를 꿈꾸는 것이 나쁜 일일 수는 없지만,
그 힘 있는 자리가 누구에게서 비롯되었고, 또 그 자리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그 자리와 힘을 잃지 않으려는 생각에 불의와 부정에 쉽게 유혹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시를 받거나 지시하는 자리를 구분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의 제자라는 유일한 자리를 꿈꾸며 묵묵히 말씀과 믿음에 따라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무죄한 속죄양이신 예수님 2014년 4월 16일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평화를 깨는 자로 고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1차 심문 결과는 무죄였습니다.
한편 무죄한 자를 죽음으로 모는 자들이 정결 예식을 지키려는 노력은 대단합니다.
자기들의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예수님의 재판을 이방 총독에게 미뤄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죄와 온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십니다.
무죄한 분으로서 죄 짐을 지고 가십니다.
무죄한 죽음만이 진정한 속죄양이 됩니다.
유대인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속죄양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요 11장 48~53절).
드디어 예수님을 체포했고, 로마의 평화에 저촉되는 죄의 명분을 씌워서 십자가형으로 죽이려 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로마의 평화를 명분으로 자기 백성들의 삶의 안전을 도모했습니다.
로마가 제공하는 평화와 안전을 소망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치 종교적인 가치로 살아가는 자들인 것처럼 정결의식을 핑계대고 빌라도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철저하게 로마의 지배질서 아래서 자신의 종교적 권력을 즐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이 이런 속죄적 기능을 잃어버릴 때, 기독교는 기득권의 품 안에서 즐기는 오락장이 됩니다. 우리의 삶은 철저하게 복음적이어야 합니다.
악한 현실에서 갈등하면서 고난당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만이 가실 수 있는 그 길을 이미 걸어가셨기에 우리가 걸어갈 수 있습니다.
돈이나 경쟁, 지위 쾌락 등의 질서로 움직이면서 경건을 가장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속죄양이신 예수님을 거짓된 포장으로 이용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무죄하신 주님께서 속죄양이 되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성도들이 되고 있습니까?
묵상질문
우리가 이 세상에서예수 그리스도께 원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군중들이 유월절 특별 사면으로 예수님보다 바라바를 원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만일 내가 어떤 자리나 힘을 욕망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 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습니까?
-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한 내용과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기도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어떤 자리나 힘을 욕망하기보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자리가 전부임을 알고,
그 자리에서 말씀과 믿음에 따라 결단하며 행동하는 자가 될 수 있게 해주세요.
- 무죄하시지만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기 위해서 묵묵히 십자가로 가신 진정한 속죄양, 주님을 찬송합니다.
- 예수님의 속죄양 되심을 진심으로 의지하고
그의 복음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가도록 힘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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