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순종 2016년 3월 21일 월요일
요한복음 18:1~18:11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2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성경 길라잡이
기드론 시내(1절):
예루살렘과 감람산을 가르는 골짜기를 기드론 시내라고 하는데, 어두운 골짜기라는 뜻이다.
이곳에는 우기가 되면 물이 흘렀다.
기드론 시내는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난을 피해 건넜던 시내로, 지금은 물이 없는 마른 골짜기이다.
겟세마네는 예루살렘과 가까우면서도 한적하므로 기도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유다는 자신이 예수님께로부터 말씀을 배우던 그 장소를 예수님을 넘겨줄 범죄의 자리로 이용했다.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3절):
여기서 ‘군대’는 로마의 군사들을,
‘아랫사람들’은 성전을 지키며 질서를 유지하는 일종의 수비대, 보안요원들을 말한다.
이런 자들이 대동된 것을 통해
예수님의 체포에는 로마의 정치적 세력과 유대의 종교적 세력의 협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사렛 예수라……내가 그니라(5절): 기도하시기 위해서 감람산에 가셨다(눅 22장 39~40절).
그때 예수님을 잡으려고 한 무리들이 유다의 인도를 받고 왔다.
누구를 찾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대답한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한 나다나엘의 말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라고 대답하셨는데, 이는 나사렛 예수이심을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신명이기도 하다(나는 ……이다, 스스로 있는 자).
선한 것이 기대되지 않는 곳에 오신 하나님이시다.
땅에 엎드러지는지라(6절):
예수님께서 자신을 체포하러 온 자들에게 ‘내가 그니라’ 말씀하실 때
로마 군대는 그분의 당당함과 신성함에 엎드러졌다.
엎드러지는 것은 하나님을 대하는 일반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내게 주신 자 중에서(9절):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맡기신 자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이다(요 17: 12, 13: 1).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10절): 베드로는 아마 쉽게 감출 수 있는 로마식 단검을 소유하였을 것이다.
자발적 순종 2016년 3월 21일 월요일
유다의 배반으로 예수님께서 군대에 잡히십니다.
그러나 무기력하게 잡히시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을 넘겨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억지로, 수동적으로 고난을 겪으시고 죽으신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그니라’하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제물로 스스로 넘겨주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자기선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이신지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말은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것처럼 사람이 되신 하나님,
즉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위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던 로마 병사들조차도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신적 위엄을 드러내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이들의 반응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 앞에 무릎 꿇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로마가 힘으로 세상과 이스라엘을 지배했듯,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힘의 질서입니다.
사단의 권세는 무력의 권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빼어 들었던 검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력으로 지배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순종의 나라입니다.
힘으로 이루시는 나라가 아니라 순종으로 이루시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병사에게 잡혀가지 않으실 능력과 권세가 있으시지만,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십니다. 그리고 그 순종을 통해 하나님 나라와 우리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발적 순종입니다.
고난주간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어떤 고난이었는지 깊이 묵상하며,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삶으로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생략하고,
곧바로 체포당하시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이는 아마도 예수님의 신성과 위엄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즉 고뇌하는 약한 모습보다는
억울하게 체포당하는 과정에서조차 당당하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예수님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시자 무기를 들었던 군인과 하속들이 바로 바닥에 엎드러졌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체포와 핍박을 당하는 것이 힘과 악에 굴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택하신 것임을 보여줍니다.
“가장 가까웠던 친구가 가장 무서운 적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잘 이해하고,
그래서 나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믿은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한다면,
그만큼 배신감과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그 사람으로 인해 받을 상처와 아픔까지 각오해야 합니다.
물론 아무 상관없는 사람에게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도 신중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에 북받쳐 실수하기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함과 위엄 있는 자세를 잃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 땅에 오신 하나님 2014년 4월 14일 월요일
예수님께서 자신을 잡으러 온 무리들에게 나아가십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는 나다나엘의 인식은 이스라엘의 인식입니다(요 1장 46절).
그런 나사렛에 스스로 계신 자로서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기대하지 않는 곳에 오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얻기 위한 진정한 속죄양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하시는 방식은,
예수님의 주변의 다양한 집단들의 방식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무기를 들고 체포하려 온 자들, 칼을 들고 예수님을 방어하려는 베드로와 제자들, 그리고
희생양을 만들어서 로마로부터 사회를 안정시키려는 가야바를 비롯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세상의 나라가 서는 방식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성도와 교회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가지고 세워갑니다.
이것은 칼이나 무기, 그리고 희생양을 삼는 방식이 아닙니다.
스스로 희생양이 되신 예수님을 따라서 살아가는 방식만이 복음의 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생각합니까?
주님께서는 고난과 희생의 길을 걸어가셨는데,
우리는 세상의 방식을 들고 영광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자들은 아닙니까?
기대가 없는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걸음을 보면서,
우리가 섬기는 삶의 자리들도 그런 낮은 곳을 향하며 살아가는지 돌아봅시다.
섬기기 위해서 낮은 걸음으로 달려가는 자들이 되고 있습니까? 높아지려고 달려갑니까?
묵상질문
군인들이 예수님의 신적 위엄 앞에 엎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잡아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뽑아 들었던 칼을 다시 칼집에 꽂으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이 땅에 엎드러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억울하거나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때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자신이 나사렛 예수라고 밝히시는 예수님의 답변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 이 답변에 왜 무리들이 뒤로 물러가 넘어집니까?
기도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자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배신을 당하고 억울한 상황에 처했을 때 예수님께서 행하신 행동을 묵상하며,
내 삶에서도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해주세요.
- 낮은 곳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찬송합니다.
- 우리들도 주님의 몸인 성도와 교회로서 낮은 곳에서 섬기며 희생하며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 [요한]' 카테고리의 다른 글
[69][부활절]예수 나라 백성 (요한 18:28~40) (CBS) (0) | 2016.03.23 |
---|---|
[68][부활절]주님을 가르침을 따르는 삶 (요한 18:12~27) (CBS) (0) | 2016.03.23 |
[66]제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자 (요한 17:20~26) (CBS) (0) | 2016.03.19 |
[65]우리의 중보자 (요한 17:9~19) (CBS) (0) | 2016.03.18 |
[64]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 (요한 17:1~8) (CBS) (0) | 2016.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