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 2016년 2월 25일 목요일
요한복음 12:9~12:19
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성경 길라잡이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9절):
이때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집결하는 시기였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울 뿐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베다니에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던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람들이
예수님과 나사로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던 것이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3절):
이 무리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이스라엘의 왕’이라 믿었다(시 118편 25, 26절, 습 3장 15절 등).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이전 영광을 회복할 민족 지도자라 믿었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14절):
예수님은 왕이셨지만, 말이나 병거가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셨다.
그분께서는 스가랴의 예언대로 정복자가 아니라 겸손한 종으로 오셨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게 되는 과정은 다른 복음서(막 11:2-6; 마 21:2,3,6; 눅 19:30-35)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이 임자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귀를 탄 것이 아니라 구약에 예언된 대로
나귀의 주인이 미리 준비된 어린 나귀를 예수님을 위해 내어주었고,
예수님은 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16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전까지 그들은 그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제자들 중에서 누가 더 큰지 다투고(막 9장 33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길에 예수님의 좌우편을 욕망했던 것이다(마 20장 21절).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 2016년 2월 25일 목요일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그분께서 살려내신 나사로를 보려고 운집합니다.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이려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까지 죽이려는 모의는 하나님의 뜻뿐만이 아니라, 그 자신들의 신앙에도 어긋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자, 모인 무리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왕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그 왕은 위풍당당한 말이나 병거를 타지 않았고, 어린 나귀를 탔습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원했던 왕과,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왕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이 되어 섬기는 왕을 보내신 것이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시켜줄 왕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이들과 다르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야 이 일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우리는 자주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그 목표의 성취 여부에 따라 자신의 신앙을 판단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아무리 다년간 열심을 다해 신앙생활을 해도,
그런 시간들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성장시키고 성숙시키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분별하며 올바로 신앙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욕망에 비추어 일관성을 잃고 왜곡된 채로 신앙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귀’를 타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앞에 계셔서,
‘말과 병거’를 타기를 바라는 우리의 욕망을 드러내십니다.
우리의 마음 깊이 숨어있던 속살을 드러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그런 우리가 깨닫고 회개할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성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신 길을 겸손하게 걸어가신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예수님께서 부르신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삶으로
예수님이 베다니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나사로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튿날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많은 무리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소리쳤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온갖 모의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이 그를 따른다.”고 하면서 더욱 불안해했습니다. 이로써 구약의 예언(슥 9:9)대로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신 것이 온 천하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처럼,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아무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과 그의 복음의 증인들로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은 우리의 말과 삶을 통해 예수님이 왕이신 것이 선포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본래 증인이란 목격한 것을 그대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만일 내가 예수님의 증인이라면,
내가 먼저 예수님이 왕이신 것과 그분의 구원을 목격할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치게 하시겠다는 말씀대로 내게서 그런 기회가 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까? 2015년 3월 30일 월요일
'혹(惑)한다'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습니까?
'혹'은 '의심하다, 정신을 혼미하게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들은 어떤 것에 의해 미'혹'되기도 합니다. 무언가에 의해 유‘혹’받기도 합니다.
나를 미혹한 어떤 것, 나를 유혹한 무언가에 일차적으로 잘못이 있습니다.
하지만 미혹되고 유혹받은 나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를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있던 무리들에 의해 큰 환영을 받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13절)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 식민지 현실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킬 '이스라엘의 왕'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놀라운 이적에 관한 이야기만을 들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18~19절)
그 표적에만 사로잡혀, 그 이적을 보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위대한 기적치유자를 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찬양과 환영과 찬사는 비난과 욕설과 저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것을 넘어서서 예수님을 근본적으로 만나는 오늘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15절)
묵상질문
나사로 때문에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의 믿음은(11, 18절)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사람들이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향해 열광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찬송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왕이신 것과 그분의 구원을 목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
우리가 바라는 구원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우리의 영적인 민낯이 드러났을 때, 겸손히 돌이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예수님이 왕이신 것과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사건들을 목격할 수 있게 하시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해주세요.
사랑의 하나님!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 그분을 만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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