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만 번지르르한 도둑과 같은 신앙 2016년 2월 24일 수요일
요한복음 12:1~12:8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300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성경 길라잡이
유월절 엿새 전에(1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주일에 있었던 일이고, 본문에 기록된 마리아의 향유 사건은 그보다 하루 앞선 토요일에 있었던 일이다. 예수님은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종려주일의 하루 전 날, 즉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하루 전 날에 예루살렘에서 약 3km쯤 떨어진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 머무셨는데, 그곳에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의 죽음과 장사되심을 예비하는 향유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5절):
마리아의 행동을 지켜보던 가룟 유다의 말이다.
겉으로 보기엔 정의로운 표현이지만, 그의 마음에 담긴 탐심이 드러난 것이다(6절).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8절):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정당화 해주시는 선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 현실에서는 오히려 반대로 적용된다.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바라지만, 우리는 가난한 자들 곁에 머물기 싫어한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우리의 말이 무색해지는 경험이다.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이는 “너희가 계속해서 나를 소유하지는 못한다”라는 뜻인데,
예수님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아시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아직 깨닫지는 못하고 있었다.
말만 번지르르한 도둑과 같은 신앙 2016년 2월 24일 수요일
이전에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맞이하여 접대일로 분주한 상황에서,
동생 마리아가 거들지 않아 속이 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과 대화하던 모습에서 예수님과 이들 가족 사이의 사귐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눅 10장 38~42절).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식사하고 계실 때,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았습니다.
향기가 집안에 가득했고 사람들은 금세 그 상황을 알았습니다.
그때 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 사람 유다가 말을 합니다.
“이 향유를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지 않은가?
이것은 300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값비싼 것인데 말이야.”
유다의 이야기가 틀린 이야기 같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가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여 한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유다를 ‘도둑’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가룟 사람 유다는 3년이나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의 믿음이 참된 것인지 거짓된 것인지가 본문의 사건에서 드러납니다.
가룟 유다가 평소에 얼마나 가난한 사람을 위해왔는지는 가까이에서 함께 있어온 사람들이 알았을 것입니다. 별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삶을 살지도 않다가
갑작스럽게 그런 자리에서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것처럼 하는 말이,
사도 요한에게는 부당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분명하게 도둑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하고 아는 것이 많아지는 것이 제자로서의 삶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배운 것과 아는 것, 사는 것이 한 가지가 되는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말만 번지르르한 도둑과 같은 신앙이 아니라, 진실하고 한결같이 신앙하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지금 떠오르는 가난한 형제와 자매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하여 향유를 깨뜨리는 행동을 해봅시다.
삶으로
유월절의 어린 양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위한 대속의 제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사랑과 존경의 고백을 담아 드린 300 데나리온의 향유가,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 대속의 죽음을 죽게 되시는 것을 기념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한편 비록 가룟 유다가 사심으로 한 말이긴 하지만, 누구나 마리아가 향유를 아깝게 허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이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실
자신의 죽음을 위한 것이라면서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헌신은 참 값지고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정작 헌신의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헌신한다면, 그것은 바른 헌신이 될 수 없고
예수님의 마음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헌신은 가룟 유다와 같이 다른 사람의 헌신을 시기하고,
나아가 그것을 헐뜯고 비난하는 자리에 서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그 뜻대로 헌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뜻이나 욕심, 또는 다른 사람의 이목에 의해 헌신하는 것은
차라리 헌신하지 않는 것만도 못하게 됩니다.
거룩한 낭비 2017년 4월 10일 월요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하기 위해 300데나리온 어치나 되는 향유를 예수님 발에 쏟아붓고
그녀의 머리털로 닦은 이 사건을 한 신학자는 "거룩한 낭비"라는 용어로 설명했습니다.
효율성을 강조하고 합리적 사고를 내세우는 현대인들에게
마리아의 행동은 무모하고 비합리적이라고 보일것입니다.
300데나리온은 장년 300명의 하루 일한 품삯에 해당되는 비싼 것이니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했느냐?"고 따져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였습니다.(요12:7, 새번역)
예수님은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일을 자신의 장사(葬事)와 연결지어 생각하시고,
마리아의 행동을 좋게 받아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라고
극찬하셨습니다.(막14:9)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적은 것을 드리고도 아까워하지만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큰 것을 드리고도 더 드리지 못하여 아쉬워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한 마리아는 300데나리온의 향유도 아깝지 않았지만
은혜를 모르는 가룟 유다에게는 그것이 낭비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번 고난주간 동안,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사랑을 묵상하고 깊은 은혜의 강물에 잠깁시다.
주님의 사랑에 감사합시다.
묵상질문
신앙생활이 길어지면 아는 것이 많아지는데, 그것이 삶으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번지르르한 말만 하는 것은 아닌지요?
마리아의 헌신과 가룟 유다의 헌신에서 어떤 차이를 볼 수 있나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고, 이를 위해 나는 어떻게 헌신해야 할까요?
기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말과 삶이 한결같은 신앙을 하게 해주십시오.
신앙의 연차가 길어질수록 말씀으로 삶을 온전히 비추며,
스스로가 무익한 종이라 고백하고 순종할 수 있는 삶이 되게 해주십시오.
나와 우리 공동체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온전히 헌신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의 헌신을 시기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응원하는 자가 되게 해주세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베푸신 사랑을 깊이 깨닫고 마음 깊이 감사하는 고난주간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요한]' 카테고리의 다른 글
[48]하나님 나라의 법칙―죽음을 통해 주어지는 생명 (요한 12:20~26) (CBS) (0) | 2016.02.26 |
---|---|
[47]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 (요한 12:9~19) (CBS) (0) | 2016.02.25 |
[45]죽음의 위기로 내몰리시는 예수님 (요한 11:47~57) (CBS) (0) | 2016.02.25 |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 (요한 11:38~46) (CBS) (0) | 2016.02.25 |
[죽음]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 (요한 11:28~37) (CBS) (0) | 2016.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