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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 (요한 11:28~37) (CBS)

colorprom 2016. 2. 25. 15:18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 2016년 2월 20일 토요일

 

요한복음 11:28~11:37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성경 길라잡이

 

그를 어디 두었느냐(34절):

예수님이 나사로가 장사된 무덤의 위치를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나사로의 집에 모인 사람들의 관심을 이미 죽어 4일이나 지난 나사로의 시체에 집중될 수 있도록

유도하시기 위한 질문이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5절): 이것은 ‘슬퍼서 예수님이 울기 시작하셨다’는 뜻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는,

첫째로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심을 보여주는 것이고,

둘째는 예수님이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방인의 신들과는 달리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본질적인 연약함을 이해하시는 분이다.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의 슬픔에 진심으로 슬퍼하시며 동참하시지만,

그 슬픔의 바탕에는 부활과 기쁨이 곧 뒤따를 것이라는 앎이 깔려있었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진심으로 애통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본보기는 고난과 죽음이라는 현실에 대한 진솔한 반응을 보여준다

(ESV스터디바이블 참고).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 2016년 2월 20일 토요일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않으신 예수님을 마리아가 만납니다. 사람들도 마리아를 따라나섰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습니다’라며

눈물을 흘립니다. 이미 죽은 지 나흘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사로의 죽음은 큰 슬픔이고 아픔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유대인들의 눈물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비통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모든 힘을 잃게 만드는 죽음 앞에서,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눈물을 마주합니다.

그 눈물은 죽음과 절망의 고통으로 가득한 우리의 현실을 불쌍히 여겨 구해내고자 하시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해봅시다.

우리는 고통의 자리에 함께 서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고통을 정직하게 직면할 힘이 없습니다.

그 고통에 함께 눈물 흘릴 마음의 여유도 없습니다. 그래서 애써 외면하며 내 갈 길을 걸어가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죽음은 거리가 멀지만,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께서는 눈앞의 죽음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긍휼은 고통의 자리에 함께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죽음과 절망이 가득한 이 땅을 슬퍼하며 불쌍히 여겨 구하시려는 마음입니다.

 

그 긍휼은 죽음의 권세 아래 고통 받는 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었습니다.

이제 그 힘으로 우리는 죽음과 고통의 문제를 정직하게 슬퍼하며, 그 자리에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을 담아, 우리들이 처한 고통의 자리를 함께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삶으로

 

예수님의 관심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믿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을 확인하고자 하셨고,

그 결과 그들이 아직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음을 보시고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반면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나사로의 죽음을 막지 못했던 예수님을 원망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실 것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부활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구속사역의 완성이 되기 위해서는

그분의 부활하심과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도 이 날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소망할 수 있는 것도 부활이 그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같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든 소망을 잃은 채 세상이 제공하는 다양학고 휘황찬란한,

하지만 결국에는 아무 의미 없고 헛된 소망들에 현혹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눈물 2015년 3월 28일 토요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의 우는 것과,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셨습니다.(33절)

여기서 '비통히 여기다'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흥분하여 콧김을 내뿜는 모습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격렬한 불쾌감'을 동반한 슬픔입니다.


우리 주님을 불쾌하게 만들어 눈물을 흘리게까지 한 요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의 불신앙입니다.

주님은 평소 나사로 가정에 자주 들러 숙식을 같이하며 천국의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눅 10: 38~42)

자신이, 영생을 주시고자 이 땅에 오신 '메시야'라는 사실도 가르치셨습니다.(요 4: 14)

그런데 사람들은 나사로가 죽었다며 깊은 슬픔과 절망감에 휩싸여있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희망을 잃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는 마리아의 말은

신앙과 불신앙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듯 보입니다.(32절)


우리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바로 주님을 향하여 믿음을 보일 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실천할 때, 주님은 그것을 당신의 즐거움으로 삼으십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 25: 13)




묵상질문

 

마리아와 사람들의 눈물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예수님의 눈물에 사람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예수님께서 비통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부활에 대한 믿음은 나로 하여금 세상과 삶에 대해 어떤 전망과 소망을 갖게 할까요?

 

기도

 

긍휼의 마음으로 고통의 자리에서 정직하게 애통하게 해주십시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 땅을 바라보게 해주십시오.

 

세상이 제공하는 헛된 소망들에 지쳐 절망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의 소망과 믿음을 가진 자로서,

세상과 삶에 대한 새로운 전망과 소망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사랑의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실천하여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