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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죽음]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요한 11:17~27) (CBS)

colorprom 2016. 2. 25. 15:07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2016년 2월 19일 금요일

 

요한복음 11:17~11:27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5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성경 길라잡이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

마르다는 비난이 아니라 비통함을 표하고 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맞이할 힘조차 없어 보인다.

오라버니의 죽음은 그들의 믿음에 위기를 가져왔지만, 예수님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절): 이 말에 마르다가 당면한 문제의 핵심이 있다.

여기서 ‘다시 살리라’는 말은 ‘일어날 것이다’ 또는 ‘설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는 ‘앉거나 누웠다가 일어나는 것’(마 26:62), 또는 ‘병에서 회복되어 일어나는 것’(막 9:27)을 가리키지만,

본문에서는 분명히 ‘죽은 자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25절): 비통해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신다.

예수, 그분께서 바로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오시는 그리스도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죽음 이후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전망할 수 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26절): 이 말은 마르다가 믿음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지금 마르다가 가진 믿음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활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즉 마르다의 믿음은 아직 부활에 대한 깊은 믿음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2016년 2월 19일 금요일

 

나사로가 죽어 무덤 안에 놓인 지 나흘이나 흘렀습니다.

그의 누이들은 많은 조문객들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큰 비통함에 빠져 있습니다.

큰 슬픔에 잠긴 자매에게 그렇게 기다리던 예수님이 도착하셨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마중 나온 마르다와 예수님 사이에 짧지만 의미있는 대화가 오고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던 마르다의 믿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부활 사이에 존재하던 큰 간극그분 안에서 통합됨을 밝히십니다.

부활과 생명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통치 예수님 안에서 현실이 된다는 말씀이,

비통함에 가려졌던 마르다의 눈을 열어줍니다.

마르다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뵙고,

오라버니가 죽음을 이긴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음을 확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르다의 믿음은 그녀가 처한 현실을 초극하게 합니다.

일상에서 우리들은 어쩔 수 없는 다양한 절망과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에 드는 생각은 ‘죽을 것 같다’입니다.

실제로 죽고 싶다기보다는, 절망의 최대치를 죽음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일상에서 죽음의 지배 아래 살아갑니다.

죽지 않기 위해 먹고, 죽음을 피하는 안전한 길에 들어서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예수님에 대한 신앙보다는,

실제 일상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낼 다양한 힘을 의존합니다.

대표적으로 돈과 쾌락과 권력을 통해 죽음이 가져오는 두려움을 몰아내려 합니다.

 

하지만 죽음을 이기는 진짜 힘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집니다.

그분을 통해 죽음 이후에 존재하는 참 생명의 세상을 맛보고, 소망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려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삶으로

 

죽음은 어떤 사람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이제껏 어떤 문명이나 기술도 죽음을 극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두려움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곧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에 슬퍼하는 마르다에게도

‘그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아직은 막연한 부활의 소망만을 가진 마르다에게

부활의 소망이 실제로 무엇인지 직접 보여주시기로 하십니다.


부활의 소망이요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생명의 말씀이며, 또한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질 진리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는 자영생진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절망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며,

나아가 장차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의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날마다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는 일이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살아있는 신앙 2015년 3월 27일 금요일


오늘 본문에서 읽을 수 있는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필적할 만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는 말이

마르다의 신앙고백입니다.(27절)

예수님께 칭찬받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았지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 16)


그러나, 신앙고백은 했지만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예수님을 모른다 세 번이나 부인했었던 베드로처럼,

마르다도 신앙고백은 했지만 예수께서 나사로를 지금 당장 살려주실 거라고는 믿지 못했습니다.

 

지식으로 예수님의 신적 권위와 능력을 인정했지만,

그분의 신적 권위와 능력이 ‘지금, 여기’의 자기 삶에서 구체적으로 역사할 거라고 믿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그녀는 말했지만,

(22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살아나리라' 생각했던 것이지요.(24절)


오늘 우리들 역시 베드로마르다처럼

그리스도에 관해 교리적 지식에 입각하여 근사하게 신앙고백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구체적 현실 속에서 예수님이 '활동'하시리라 믿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은 화석화되어있는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같이 화석화되어있는 신앙을, 우리는 넘어서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역사하시고 당면문제를 해결해주신다는 것을

믿어야겠습니다.


묵상질문

 

예수님께서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반응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후 마르다의 신앙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마르다에게 ‘네가 믿느냐’라고 했을 때, 그 믿음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그것을 열심히 배우고 묵상하고 있나요

 

기도

 

실패로 말미암은 절망과 슬픔의 자리에서도, 우리를 찾아오신 생명의 주님을 바라보게 해주십시오.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 가운데, 생명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묵상함으로 믿음의 깊이가 날마다 더욱 깊어지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참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가 되게 해주세요.


사랑의 하나님, 우리의 신앙이 화석화되지 않게 하시고 살아있는 신앙이어서,

어떤 상황과 환경에도 부활의 능력을 믿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