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들으시고 보십시오! 2015년 9월 5일 토요일
이사야 37:8~37:20
8 앗수르 왕이 라기스를 떠났다 함을 듣고 랍사게가 돌아가다가 그 왕을 만나니 립나를 치고 있더라
9 그 때에 앗수르 왕이 구스 왕 디르하가의 일에 대하여 들은즉 사람들이 이르기를
그가 나와서 왕과 싸우려 한다 하는지라 이 말을 듣고 사자들을 히스기야에게 보내며 이르되
10 너희는 유다의 히스기야 왕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기를
너는 네가 신뢰하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에 속지 말라
11 앗수르 왕들이 모든 나라에 어떤 일을 행하였으며 그것을 어떻게 멸절시켰는지 네가 들었으리니
네가 구원을 받겠느냐
12 나의 조상들이 멸하신 열방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및 들라살에 있는 에덴 자손을
그 나라들의 신들이 건졌더냐
13 하맛 왕과 아르밧 왕과 스발와임 성의 왕과 헤나 왕과 이와 왕이 어디 있느냐 하라 하였더라
14 히스기야가 그 사자들의 손에서 글을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 놓고
15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16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17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뜨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람을 보내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
18 여호와여 앗수르 왕들이 과연 열국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나
이들은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뿐이요 나무와 돌이라 그러므로 멸망을 당하였나이다
20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하니라
성경 길라잡이
앗수르 왕이 라기스를 떠났다 함을 듣고(8절):
산헤립은 처음부터 이집트가 개입할 것을 예측했기에
주력부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지 않고 라기스에 머물고 있었다.
이점에서 산헤립은 단순히 유다만을 정복 대상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이집트까지 염두에 두고 움직인 것이었다.
구스 왕 디르하가(9절):
구스 왕이 이집트의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성경은 디르하가를 구스 왕으로 부른다.
디르하가는 산헤립에게 패하여 돌아간다.
이사야는 이미 여러 번 이집트가 유다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 예언했다(30장 3, 7절, 31장 3절).
너는 네가 신뢰하는 하나님이 … 하는 말에 속지 말라(10절):
산헤립은 하나님을 더욱 모독하면서 쟁점을 분명히 한다.
즉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사람의 위협인 것이다(참조, 36:5, 7, 15, 18).
히스기야가 …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14절):
히스기야는 사자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과만 상대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룹(16절): 이는 창조세계를 상징하는 복합적인 피조물이다.
그래서 혹은 성전의 봉사자로, 혹은 하나님의 보좌의 운반자, 언약궤의 수호자로,
혹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생물로 묘사된다.
여호와여 앗수르 왕들이 … 그러므로 멸망을 당하였나이다(18-19절):
이 두 구절은 히스기야의 현실주의를 보여준다.
곧 히스기야의 믿음은 맹목적인 낙관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압도적인 의식이다.
천하 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20절):
이집트의 개입으로 앗수르의 예루살렘 포위가 일시적으로 풀렸지만,
히스기야는 이를 진정한 구원으로 여기지 않았다.
대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조롱하는 산헤립의 편지에 크게 통분하며, 성전으로 나아가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구원해주시기를 요청한다.
이집트를 의지했던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묵상과 삶
구스 왕 디르하가의 개입으로 전쟁의 판도가 요동쳤지만, 히스기야는 이 사실에 일희일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산헤립의 편지를 들고 하나님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 속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사람이 만들어낸 우상이 아니라,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눈을 뜨고 보시며, 천하만국을 통치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기에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고 믿지 않는 자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또한 살아계신다고 믿어도 통치하신다고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 역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통치하신다고 굳게 믿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무신론은 비그리스도인들만의 문제 같지만,
사실 입으로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 고백해도 삶으로는 이를 부정하는 실천적 무신론이
자칭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만연하고 있습니다.
실천적 무신론으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서 세속의 가치관들이 자리 잡고,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세상 나라를 추구하게 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이런 실천적 무신론의 가장 흔한 증세는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 믿고 그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다면 기도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진단해봅시다.
매순간 직면하는 현실의 문제 앞에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기도입니까?
아니면 얄팍한 ‘현실적’ 계산입니까?
살아계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야 말로 세속 신념과 구분되는 신앙의 시작입니다
삶으로
앗수르 왕 산헤립은 다른 전쟁을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나면서도
이것이 하나님이 그들을 지켜준 것이라고 믿지 말라고 위협합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성전에 올라가서 그룹 사이에서 천지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그는 자신의 안전을 앞세우거나 자신의 의를 변호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성품에 의지하여 기도합니다. 곧 모든 피조물보다 높이 계시면서도 여기 낮은 우리 가운데 임하시어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생각을 집중하고, 오직 그분의 영광만 바랐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하자 29만의 영국군대가 쫓기어 도버해협에 이르렀습니다.
히틀러는 그들을 전멸시키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그 때 영국의 왕 조지 6세는 전 국민에게 ‘기도의 날’을 선포하며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독일군 진영에는 큰 폭풍우가 일어 비행기나 탱크가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도버해협은 잔잔하고 고요해 수많은 배가 영국군대를 무사히 나를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영국군대는 물론 온 영국의 국민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큰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50:15)
는 말씀을 기억하고 늘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묵상질문
산헤립의 편지(10~13절)와 히스기야의 기도(16~20절)는 각각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히스기야가 기도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요?(20절)
지금 나의 기도제목은 무엇이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함인가요?
기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통치하신다고 진정으로 믿게 해주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세상을 향해 힘차게 저항하게 하소서.
나의 사소한 이익이나 탐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기도를 할 수 있게 하시고,
그런 기도의 응답을 날마다 체험하는 자가 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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