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하나님을 신뢰하겠습니다 2015년 9월 3일 목요일
이사야 36:11~36:22
11 이에 엘리아김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이르되
우리가 아람 방언을 아오니 청컨대 그 방언으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씀하고
성 위에 있는 백성이 듣는 데서 우리에게 유다 방언으로 말하지 마소서 하니
12 랍사게가 이르되 내 주께서 이 일을 그 하나님 네 주와 네게만 말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으며 자기의 소변을 마실 성 위에 앉은 사람들에게도 하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냐 하더라
13 이에 랍사게가 일어서서 유다 방언으로 크게 외쳐 이르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14 왕의 말씀에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라 그가 능히 너희를 건지지 못할 것이니라
15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신뢰하게 하려는 것을 따르지 말라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시리니 이 성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할지라도
16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각 자기의 포도와 자기의 무화과를 먹을 것이며 각각 자기의 우물 물을 마실 것이요
17 내가 와서 너희를 너희 본토와 같이 곡식과 포도주와 떡과 포도원이 있는 땅에 옮기기까지 하리라
18 혹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할지라도 속지 말라
열국의 신들 중에 자기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19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스발와임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20 이 열방의 신들 중에 어떤 신이 자기의 나라를 내 손에서 건져냈기에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하니라
21 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대답하지 말라 하였음이었더라
22 그 때에 힐기야의 아들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자기의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나아가서 랍사게의 말을 그에게 전하니라
성경 길라잡이
우리가 아람 방언을 아오니(11절):
아카드-앗수르어를 사용했던 앗수르는 지중해 연안으로 진출하면서,
보다 사용이 편리한 아람어를 국제외교언어로 사용했다.
또한 유다의 히브리어는 아람어와 같은 계열의 언어이다.
이는 당시 국제적인 외교 언어였는데, 랍사게는 이 언어가 아닌 유다 방언으로 연설했다.
이는 명백히 유다 백성들을 분열, 선동하기 위한 것이었다.
랍사게가 유다 방언, 즉 히브리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앗수르가 유다를 침략하는 일을 치밀하게 준비했음을 알 수 있다(13절).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으며 자기의 소변을 마실(12절):
포위 상태에서 예루살렘 성읍의 사람들이 처한 기아 상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16절):
랍사게는 항복하지 않는 자들이 맞이할 12절과 항복한 자들이 맞이할 16, 17절을 대조하며
항복하기를 요구한다.
17절은 피정복민들에 대한 앗수르의 이주정책을 반영한다.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20절):
랍사게는 연설에서 ‘신뢰’(4, 6, 7, 15절)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연설의 주제는 ‘예루살렘이 그의 신뢰를 누구에게 두겠느냐?’인데
랍사게는 하나님조차도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산헤립의 말은 많은 신들을 보유한 강력한 국가들도 모두 앗수르에게 백기를 들었거든
하물며 하나의 신밖에 없는 약소국 유다가 앗수르를 막아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산헤립은
여호와 하나님이 다른 신들 가운데 하나의 신이 아니라 참되고 유일하신 창조주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묵상과 삶
예루살렘은 고립무원의 상태입니다.
이에 랍사게는 지중해 연안의 왕국들을 정복한 과거를 떠올리며(18~20절)
하나님도 예루살렘을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하지 못하실 것이라 당당하게 선언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앗수르에게 항복하고 주인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랍사게가 했던 것과 같은 이런 주장은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며 반복됩니다.
앗수르를 이어 등장한 바벨론도 스스로 하늘의 주인이 되려 했습니다(사 14장 13절).
예수님과 초대교회를 박해했던 로마제국은 나사렛 예수가 아닌 로마의 황제가 진정한 ‘주’라 외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역사를 통해 오만했던 앗수르, 바벨론, 로마제국의 종말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크게 세력을 떨치며 소리쳐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모든 세상의 왕이셨습니다.
근대의 철학자들은 앞다투어 종교의 허구성을 주장하며,
인간이 스스로 ‘초인’(超人)이 되어 세계를 지배하는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또한 한결같이 사람이 계속해서 진보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오만했던 이들이 종내 다다른 지점은,
모든 것을 파괴하며 그 끝을 알 수 없는 엄청난 규모의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우리 세상은 언제나 ‘경험’과 ‘합리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밀며
하나님을 자신의 세계에서 몰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먼저 밀려나고 무너진 것은 하나님을 부정했던 세상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신자들은 세상의 수많은 주장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 귀에 들리는 세상의 목소리에 주눅 들지 마십시오.
그 목소리보다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드십시오.
삶으로
랍사게는 히스기야에게 항복을 요청합니다.
애굽도 여호와도 그리고 히스기야의 모략과 용맹도 앗수르를 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히스기야의 신하들은 랍사게에게 유다의 언어가 아니라 아람의 언어로 말함으로써
유다 백성들이 수치를 당치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보기좋게 거절당합니다.
오히려 랍사게는 계속해서
여호와를 의뢰하지 말고 앗수르 왕에게 항복하는 것이 그들이 안식과 평화를 얻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안식과 평화는 여호와가 아니라 앗수르 왕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출애굽기 14장 13절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말입니다.
참된 안식과 평화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새는 날개가 아무리 무거워도 그것을 떼어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날개 때문에 날아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나 기차 역시 돛 또는 엔진이 아무리 무거워도 그것을 떼어내지 않습니다.
그 돛이나 엔진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또한 같은 역할입니다.
설령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무겁게 느껴지더라도
오직 그것만이 우리의 삶에 의미와 구원을 준다는 것을 기억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묵상질문
항복을 권하는 랍사게의 연설은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까?(18~20절)
랍사게의 연설이 현대에서는 어떤 논리로 재현되고 있습니까?
랍사게의 연설에 예루살렘은 어떻게 반응합니까?(21~22절)
랍사게가 제시한 평화는 무엇인가요?(16절)
이에 반해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무엇일까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은 무엇인가요?
기도
오만한 세상의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공동체 안에 머물게 해주십시오.
오늘날 세상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거짓된 안식과 평화에 미혹되지 않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안식과 평화를 분별하고 바랄 수 있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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