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과 욕망 2015년 5월 20일 수요일
마태복음 20:17~20:28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성경 길라잡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목 박게 할 것(19절):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예고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결코 우연이거나 사람들이 지어낸 허구가 아님을 보여줌은 물론,
자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의 자발적 헌신과 순종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20절):
살로메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여인 중 하나로,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자매 사이다.
그렇다면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사촌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22절): 예정된 고난을 상징하는 은유다.
분히 여기거늘(24절):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의 친척관계를 이용하여
제자들 가운데 수위권을 노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26절): 이것은 굉장한 역설이다.
세상의 기준과 가치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왕이신 천국에서는 세상에서 멸시받고 천대받던 사람들이 큰 자가 될 것이다.
천국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 전혀 다르다.
섬김과 욕망 2015년 5월 20일 수요일
예루살렘에 가까워질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훈련도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여전히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리라 구체적으로 언급하시며 심지어 십자가의 죽음까지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무지하고 경박하게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왕국에서 더 높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다투고 질투하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광은 낮아지고 섬기는 일에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우리의 영광도 또한 자기희생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희생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SNS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심리 중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려는 욕구입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권력욕에 대한 욕망과 의지가 인간의 생명력이자 이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자기의 영광, 혹은 권력에 대한 욕망은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 은밀히 자리하고 있는 우리의 실존입니다.
타락한 인간과 세상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받고 싶은 욕심으로 움직이지만,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곧 섬김을 받고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섬기고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세상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섬김과 낮아짐을 닮아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고난의 잔 & 구원의 날 2015년 5월 20일 수요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조롱과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게 되겠지만,
곧 3일 만에 부활하게 될 것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이 마지막 예루살렘에서의 일주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30여년의 시간을 준비해 오신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는 것도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께서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시면 다윗의 나라를 회복하고 왕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제자의 어머니는 예수님께서 왕이 되실 때에 자기 아들들에게 높은 자리를 달라고
청탁까지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믿음이 없으면 헛된 욕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믿음의 눈으로 참된 실재를 보지 못하고 헛것을 위해 으뜸이 되거나 큰 자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은 헛것이 아닌 참된 실재를 보고,
따라서 섬김을 받으려 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섬기는 자리로 내려가고자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지고 기꺼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려고 힘써야 합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2017년 5월 10일 수요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에게 두 아들을 맡긴 어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대뜸 이렇게 구했습니다.
"나의 이 두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20:21)
이러한 간구가 괜찮다고 느껴집니까? 그 정도쯤은 요청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까?
다른 자리도 아니고 예수님 옆자리니까 좀 낫지 않은가 생각됩니까?
나중에 그 이야기를 열 제자가 듣고 화를 냈으니, 그들도 모두 같은 마음이었던 듯합니다.
좋은 자리, 나은 자리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어머니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마20:21)
우리가 이기적으로 구하는 한 우리는 우리가 구하는 것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 위해서 어떤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요?
성서는 한 가지 중요한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바로 솔로몬의 기도입니다.
솔로몬이 구한 것은 "듣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송사를 잘 들어 더 잘 재판하고자 하였습니다.(왕상3:9)
그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왕상3:10)
기도의 원칙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마음에 드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솔로몬의 기도는 철저히 이타적인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금 나의 기도내용을 솔로몬의 기도에 비추어봅시다.
섬김, 함께 사는 길 (2019년 11월 8일 금요일) (28)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10여 년 전 어느 추운 겨울, 미국 워싱턴 포토맥 강에 비행기가 추락했습니다.
강에 빠진 79명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헬리콥터가 나타났지만, 5명만 탈 수 있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들은 서로 밧줄을 잡으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가까스로 밧줄을 잡고 헬리콥터에 올라탔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밧줄이 내려왔습니다.
한 사람이 밧줄을 잡으려고 손을 내민 순간 다른 한 사람도 밧줄을 향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그중 한 사람이 밧줄을 놓더니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입니다.
줄을 양보한 사람은 고갯짓으로 빨리 밧줄을 잡으라는 신호까지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물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다섯 번째 사람은 밧줄에 이끌려 공중으로 올라갔고, 살았습니다.
밧줄을 아니 생명을 양보한 그 사람이 누군지 끝내 알 수는 없었습니다.
언론은 그를 ‘자기를 죽이고 남을 살린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 마가의 다락방에 제자들과 함께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식사 도중에 예수님이 갑자기 일어나시더니 허리에 수건을 차셨습니다.
냄새나는 제자들의 발 앞에 예수님이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몸을 굽혀 무릎을 꿇으신 채 제자들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몸을 굽히고 무릎을 꿇으시는 섬김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그렇게 못할까요?
내가 먼저 무릎 꿇으면 될 것을, 내가 먼저 굽히면 될 것을, 우리는 왜 뻣뻣하게 서있는 것일까요?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내 안에는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사십니다(갈 2: 20).
내 힘으로는 무릎 꿇을 수 없지만, 예수님은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 그분의 힘으로 우리가 무릎을 꿇을 수 있고 또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몸을 굽혀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섬김, 내가 살고 이웃도 사는 길입니다.
섬김,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사는 길입니다.
+ 하늘에서 땅으로, 하나님에서 사람으로, 낮아짐의 도를 보여주신 하나님!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 철저히 낮아져서, 많은 생명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묵상질문
-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관한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 나머지 열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을 냈던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목적을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나요?
5 세상의 기준과 달리 천국에서 큰 자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기도
+ 그리스도의 섬김과 희생으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 그리스도의 낮아짐을 본받아 실천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 나에게 좋은 것을 다 아시는 주님, 그 좋은 것으로 나를 채워주소서. 아멘.
예수님과 그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의 헛것이 아닌 천국의 참된 실재를 보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기꺼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리로 내려갈 수 있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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