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무리의 길과 십자가의 길 2015년 5월 21일 목요일
마태복음 20:29~20:34
29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30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33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성경 길라잡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29절):
여호수아서에 언급하는 여리고가 아니라, 주전 2세기에 부근에 새로 건설한 여리고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30절): 여기서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단어는
구약에서는 ‘인간의 불행에 대해 하나님의 사랑을 구할 때 사용’되었고,
신약에서는 ‘인간의 고통에 대해 메시아의 신적 자비를 구할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지금 소경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면서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33절):
맹인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요청할지는 분명해 보였지만,
그들의 믿음을 이끌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질문하셨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34절): 주님이 맹인을 고쳐주시는 이유를 알 수 있는 표현이다.
맹인을 고쳐주신 사건은 마태복음 9:27~31절에도 기록되어 있다.
어떤 학자들은 두 사건을 같은 사건의 반복이라고도 하지만,
두 사건은 강조점이 다른 별개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강조되는데 반해,
9장의 사건에서는 ‘소경의 믿음’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큰 무리의 길과 십자가의 길 2015년 5월 21일 목요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향해서 가실 때에 큰 무리가 뒤를 따랐습니다.
이들은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환호하는 자들이었으며,
또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던 자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의 환호와 인기에 연연해하지 않으셨습니다.
무리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 맹인들에게 오히려 가까이 가셔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군중들이 원하는 길도 아니며, 군중들과 함께 갈 수 있는 길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군중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나서 그들로부터 멀리 거리를 두셨습니다.
우리는 큰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한 사람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 사회는 집단의식이 강한 사회입니다.
‘우리’라는 집단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우리들이 가진 생각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집단의식이 항상 긍정적인 기능만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집단의식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정치적 동서 지역감정이나 연고주의, 파벌주의는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폐단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기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 집단이 아니라,
성경의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집단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가치가 중심이 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교회, 사회가 단순히 자기 집단의 생각이나 이익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성경의 가치가 중심이 되는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주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2018년 10월 31일 수요일)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나아와
두 아들이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이유가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함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당사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를 말리지 않은 이유도 아마 동일하였겠지요.
그들 역시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를 탐냈고,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눈앞에서 늘 보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직접 자주 들었음에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영적 맹인과 다름없는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실 때 맹인 두 사람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다윗의 자손을 통해 오실 메시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 맹인에게 예수님은 메시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치며 예수님을 불러세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눈 뜨기를 원한다고 간청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만져주셨습니다.
그들은 이윽고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눈을 뜬 이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면에선 눈 뜨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는 데 자주 실패한 영적 맹인이었지만, 앞 못 보던 두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오래교회 다녔지만 지금 혹시 영적 맹인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봅시다.
+ 나의 영의 눈을 열어주셔서 주님을 보게 하소서. 아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2019년 10월 12일 토요일)
여리고에서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맹인 두 사람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불렀습니다.(마20:30)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 꾸짖어도 그들은 더욱 소리를 높였지요.
예수님께서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들을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눈 뜨기를 원한다고 대답했고,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눈을 만져주셨습니다.
앞을 보게 된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소리질러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였습니다.
이번이 아니면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부르짖었지요.
오직 자신들의 눈이 뜨이기를 원하는 그 한 가지 소원을 품고
어둠을 밝혀줄 예수님께 있는 힘을 다해 외쳤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눈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도 뜨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게 해주시리라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들의 믿음, 소망대로 예수님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치료해주셨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나온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는 간구는, 두 맹인뿐 아니라 우리의 기도제목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두운 우리의 눈을 밝혀주셔서 진리를 보게 하시고, ‘참 빛’을 찾게 해달라고
오늘도 기도해야 합니다.
+ 주님, 나의 어두운 눈을 밝히셔서 진리를 보게 하소서! 아멘.
묵상질문
-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 우리가 집단의식에 사로잡힐 때 어떤 문제들이 생길까요?
기도
+ 우리 공동체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무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좇아 움직이는 제자 공동체가 되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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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행하신 사역을 크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곧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사역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사역’은 그분의 사역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모든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것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증거하는 표적’으로 작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시면서 항상 ‘죄의 문제’를 언급하셨던 것입니다.
곧 인간의 질병은 ‘죄의 결과’인데,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 죄와 질병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두 맹인은 단순히 불쌍히 여김만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믿는 그들의 믿음에 근거해 질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근본적인 원인에는 죄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고통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인데,
이 길을 알려주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돈이나 의학, 기술이 아니라 오직 복음만이 우리를 죄와 고통에서 자유롭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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