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고보서]

[3]복음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약 2:1~13) (CBS)

colorprom 2015. 2. 21. 15:34

복음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2015년 2월 20일 금요일


야고보서 2:1~2:13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사람을 차별하지 마십시오 (2020년 2월 18일 화요일)


일전에 우리나라 사람과 결혼한 베트남 여성이 남편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이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폭행당한 이유는 만들지 말라는 베트남 음식을 만들었고, 한국말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문화가 다르고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 때문에

매 맞고 무시당하는 이주민들의 현주소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씀합니다.(약2:1, 새번역)

예수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에 예수님은 사람을 편견없이, 차별 없이 대하는 분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과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는 말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거나 차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생각이나 의견의 다름, 출신지나 문화의 다름, 성별의 차이, 재산의 많고 적음,

나이의 많고 적음, 장애의 유무, 결혼의 유무, 가족 형태의 차이로 차별하는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베트남 여성을 폭행하지 않으면 편견과 차별이 없는 것일까요?

나는 사람을 편견 없이 대하고 있습니까?

혹시 나도 여러 이유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거절하고 배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환대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는지 돌아봅시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워주십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3:28, 새번역)


+ 하나님께서 있는 그대로 인정하시고 사랑하시듯

우리도 편견이나 차별 없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대할 수 있도록 이끄소서. 아멘.


성경 길라잡이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1절):

영광의 주님을 강조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지금은 보좌 오른편에서 영광스럽게 계시지만,

이 땅에서는 스스로 낮아지시고 비천해지셨음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말해주고 있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6절):

당시 로마법으로는 힘 있는 자는 사회적으로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소송을 걸 수 있었지만,

그 반대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너희에 대하여 일컫는 바(7절):

그리스도와 관련된 이름, 곧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가리킨다.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라고 부르셨다.

 

복음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2015년 2월 20일 금요일

 

성경은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의 본질적인 면들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교회에서조차도 사람들이 사회적 지위나 부의 정도에 따라 서로를 대하는 태도를 달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차별하여 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이 차별을 허물어뜨리고 넘어서기 위하여 오셨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차이마저도 넘어서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엡 2장 11~22절).

우리는 누구나 사람들에게 더 나은 평가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노력하고 더욱 성실히 살아갑니다.

더 나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 자체를 죄악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더 나은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는 고민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 명품 옷과 가방, 혹은 사회적 지위나 재산의 유무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더더욱 이러한 조건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교회나 공동체에서 사람을 세울 때

사회적인 지위나 재력이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물질이나 세속적 지위가 중심이 될 때, 그리스도께서 계실 자리는 사라지게 됩니다.

 

내용

 

오늘 본문은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혹시 내가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있는지 지금 돌아봅시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에게“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말하지는 않는지, 스스로를 살펴봅시다(2~3절).

 

본문 8절과 9절에서는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본문 1절로 올라가보겠습니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우리가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내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준으로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합니다.


키가 작고 뚱뚱하면 키가 크고 늘씬한 사람보다 뭔가에 서툴 것 같고,

성적이 낮은 아이는 성적이 높은 아이보다 무식할 것 같고,

못생긴 사람보다 잘생긴 사람에게 시선이 더 갑니다.

이런저런 취향이 보통사람들과 다르면 우리는 차별한다는 의식조차 없이 무심결에 차별합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 잊지 말고 꼭 자문해봅시다. '내가 지금 혹시 차별하고 있는 건 아닌가?'


사랑은 흐릅니다 2017년 2월 14일 화요일


모름지기 생명은 흐르게 되어있습니다. 흐르지 않는 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2천여 년 전 유대 땅을 적시고

지금 우리에게 흘러들어와 새로운 생명으로 태동하고 있습니다.


사랑도 흐르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온 인류에게 흐르고 흘러서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흐르지 않는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온 사랑을 흐르게 하지 못하고 모아두고만 있다면

그 사랑은 부패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 온전한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으로 흘러나가야 합니다.

사랑은 그렇게 흘러오고 흘러나가게 되어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야고보 공동체에서는, 안타깝게도 이 사랑이 막혀있었던 듯합니다.

가난한 성도들을 차별하고 그들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들은 회당에 들어오는 사람들 가운데 부자들을 특별하게 대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홀대하여,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혼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자를 사랑하지 못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자들에 다름 아닙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어느 것 하나라도 범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법을 범한 자가 되지요?

사랑의 율법을 범하는 자가 되지 맙시다.

 

사람을 차별하지 맙시다 (2019년 8월 19일 월요일)(1~7)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자기보다 더 큰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자기보다 부자인 사람들에겐 공손하고,

자기보다 약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냉담한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눅10:27) 따르겠다고 결단한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갑을관계에서 갑을 선호하고 추앙하지요.

그런데 물질적 부의 가치를 무엇보다도 높이 평가하는 현대 자본주의사회가 아닌 옛날에도

그러한 경향은 있었던가 봅니다.

오늘의 성경본문 야고보서 2장의 내용을 보면 그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가 기록되던 1세기 후반,

교회 안에 누군가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들어오면 사람들이 친절하게 굴고,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은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이는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야고보서 저자는 측량할 길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2:5)

그러고는 곧바로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라고 꾸짖습니다.(약2:6)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며 교회에 모인 이들은

모두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이고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어야 할 형제자매들입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 주님, 내가 다른 사람을 가난하거나 힘이 없다는 이유로 차별하는 악한 일을 저지르지 않게 하소서. 아멘.

묵상질문

 

-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기를 원합니까? 그리고 그것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 교회나 공동체에서 사람을 세울 때 우리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기도

 

+ 다른 사람들을 외모와 조건으로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량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같이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고 긍휼을 베풀게하소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에게 흘러넘칩니다.

하나님, 그 사랑이 이웃에게로 흘러갈 수 있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