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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5]한계를 극복하는 능력의 근원/창 17:15~17:27 (CBS)

colorprom 2014. 2. 2. 17:33

한계를 극복하는 능력의 근원 2014년 1월 31일 금요일


창세기 17:15~17:27


창세기 17:15~17:22           


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 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20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21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2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성경 길라잡이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15절):

‘사라’는 열국의 어미라는 뜻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소망 없는 그녀에게 이루어가실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사라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18절):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스마엘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아달라고 하는 표현이다. 상황을 직시하는 겸손한 표현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표현에 가깝다.

 

한계를 극복하는 능력의 근원 2014년 1월 31일 금요일

 

아브라함은 자신이 겨우 만들어낸 후손(이스마엘)이 하나님의 약속을 계승하기를 바라는 한계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있는 한계를 극복하고 태어날 이삭과 언약을 맺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 날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례를 행합니다.


불신앙으로 시작했던 이야기가 순종으로 마무리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불신앙을 밀어내고 믿음의 순종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의지할 때 우리 안에는 소망이 생겨납니다.

그 소망에 따라 삶의 목표를 구상하고, 또 믿음의 걸음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칫 영원한 소망이 눈앞에 보이는 안정에게 자리를 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망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리고,

그것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지에 집착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상황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사랑을 묵상하고 기대해야 하는데, 오히려 열악한 현실과 상황에 갇혀버립니다.

이 때문에 소망이 아닌 안정을 삶의 목표로 삼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힘을 의지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인도하는 길은 좁고 협착해 보이고, 자신이 이룩해낸 길은 넓고 커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닙니다. 믿음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여줍니다(히 11장 1절).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일으킵니다.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눈을 열어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질서를 소망하게 합니다.

약속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그 소망에 이르는 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이루어가시는 그분의 약속을 생각해봅시다.

또한 그 약속에 믿음으로 행해야 할 증표가 무엇인지 묵상해봅시다.


불가능한 가능성 2016년 12월 19일 월요일


신앙은 반응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인간의 반응을 나타내 보여줍니다.

아브람(아브라함)과 사래(사라)의 반응이 바로 그것입니다.

열국의 아비와 열국의 어미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아브라함도 웃고, 사라도 웃었습니다. 그

러나 그 웃음은 감사와 감격과 기쁨의 웃음이 아니었습니다.
그 웃음은 불평과 원망과 절망의 비웃음이었습니다.


여성으로서 생리가 끊어진 상황에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비웃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도 무려 24년 동안이나 기다렸지만, 아무런 역사도 나타내 보여주지 않았던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의 반응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용어가 바로 '불가능(impossible)'이란 말입니다.

인간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그것은 언제나 '가능한 현실'입니다.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이란 바로 이것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인간에게 언제나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가능한' 일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며,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있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의 반응이, 오늘 우리의 반응이 아니길 바랍니다.

 

묵상질문

 

- “사라가 열국의 어미가 될 것이라”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 아브라함의 ‘웃음과 의심(17절)’이 할례를 행하는 순종으로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도

 

- 우리의 어두운 눈을 밝혀주셔서,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에 숨겨두신 하나님의 약속을 발견하게 하소서!
- 세상이 약속하는 안정보다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소망을 품고 살아가게 하소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게 하소서.

그 믿음으로 아기 예수의 오심을 고대하는 성도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