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린도전서]

[3] 십자가의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고전 1:18~31/(CBS)

colorprom 2013. 10. 28. 14:26

십자가의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2013년 10월 28일 월요일


고린도전서 1:18~31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성경 길라잡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26절):

 

고린도교회 안에는 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들도 일부 있었지만,

천한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해가는 해방 노예나 노예들이 대부분이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사회적 신분과 자신이 복음을 전했을 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예로 들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임을 강조한다.

 

십자가의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2013년 10월 28일 월요일

 

자신이 지지하는 지도자를 따라 분열되는 것은,

복음의 개념과 내용이 아니라 자신들이 추구하는 세상의 가치를 따라 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사탄이 던지는 권력의 유혹을 배척하셨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적 힘과 능력 앞에 압도당하기를 원하는 유대인들과

고상한 삶을 추구하며 철학적인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는 무능력이었으며 실패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눈에는 무능력과 실패로 보이는 그 십자가를 통해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권력과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복음을 어리석다고 조롱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자신의 개인적 정치적 능력을 부풀리거나 자신의 지혜를 과시하는 방편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복음의 핵심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메시아적 힘과 능력을 보여달라는 그 백성들에게는 너무도 무능력한 것이었으며,

또한 적의 손에 의해 처형된 실패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은 십자가는 온갖 세상의 권력과 지혜를 전복시키시고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약하고 실패한 것 같은 십자가가,

부족하고 자랑할 것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 것입니다.


이 시대가 너무도 강력한 승리주의에 의해 지배되고 있습니다.

능력이 신분을 결정하고 경쟁에서 이겨야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엄청난 기적으로, 세상적 권력으로, 탁월한 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집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을 받은 성도는 세상적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되었음을 감사하면서,

섬김과 희생이라는 바로 그 십자가의 방식으로

약한 사람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며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복음을 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 2016년 6월 27일 월요일 (고전 1:18~25)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나 대신죽으셨다는 진리를

상징적으로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때에 십자가의 도를 믿는 사람들은 당대의 사람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표적을 원하는 유대인들은 십자가 자체를 혐오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신21:23)라는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유대인들에게

메시야가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말하자면 '거리낌(스캔들)'이었습니다 .


한편 헬라인들은 합리적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이 죽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었기에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이야기에 불과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전1:23-24, 새번역)


십자가가 거리낌으로 느껴집니까? 십자가가 미련해 보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로 보입니까?


증인 2016년 3월 22일 화요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 경험들에 비추어 새로운 정보를 해석하며

무엇인가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내용 바깥에 있는 것들에 대하여서는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신의 판단이 자신의 경험내용 안에 머무른다는 점을 알고 있으면 겸손하게 되어

다른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할 수 있지만,

자신의 경험 안에서 자신이 판단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면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정죄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후자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훨씬 더 많습니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의 영역에서는

자신의 판단이 최고의 판단임을 자부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사도 바울이 한창 선교할 즈음,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으며,

십자가사건을 통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찾으며,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는 본문 말씀처럼(고전1:22)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 사람들은 끝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증명의 대상이 아닌 경험의 대상이며 믿음의 대상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의 핵심지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것,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약해서 당당합니다 2016년 1월 7일 목요일


2005년 미국 일리노이 소재 브래들리 대학이 53개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자존감 수준을 조사했습니다.

우리나라는 53개국 중 자존감 수준이 44위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아마도 '자존감 세계 44위'의 통계 속에는 한국의 기독교인들도 분명히 포함되어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여건이 불행해질 때 자존감이 위축되곤 합니다.

원치 않는 질병으로 괴로울 때, 사업이 잘 되지 않을 때, 가족관계·인간관계에서 단절과 고독을 느낄 때,

계획했던 대로 일이 풀려나가지 않을 때 우리의 자존감은 계속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여기까지는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매일반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바로 이 지점에서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믿는다면 자존감의 추락을 멈출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 기독교인의 자존감의 근거입니다.

수치스러운 죽음의 대명사인 십자가사건이 어째서 자존감의 근거가 될까요?

그것이 기독교인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고전1:23)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십니다.(고전1:27)

약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택하셨습니다.

기독교인은 약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기죽지 않고 스스로 당당합니다.


십자가의 도 2017년 6월 27일 화요일 (고전 1:18~24) ----2016년 6월 27일, 월요일! *^^*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나 대신 죽으셨다는 진리를

상징적으로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때에 십자가의 도를 믿는 사람들은 당대의 사람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표적을 원하는 유대인들은 십자가 자체를 혐오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신21:23)라는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유대인들에게

메시야가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말하자면 '거리낌(스캔들)'이었습니다 .


한편 헬라인들은 합리적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이 죽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었기에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이야기에 불과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1:23-24, 새번역)


십자가가 거리낌으로 느껴집니까? 십자가가 미련해 보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로 보입니까?


내게 십자가는? (2018년 3월 27일 화요일)


고린도는 그리스 사람들이 남북으로 왕래하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곳이었습니다.

고린도는 현대의 도시가 그렇듯 활기 넘치는 한편 사치가 심했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만큼 부도덕했고, 다양한 우상들을 저마다 열광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런 곳에 세워진 교회이다 보니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기는 했지만,

내부적으로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중 하나가 분파주의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가 생성되었습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하는 문제로 파벌이 갈린 것입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바울 사도의 마음은 착잡하고 참담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는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보다 복음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었지요.

허나 사람들은 같은 십자가 사건을 서로 달리 바라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기적)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께름칙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헬라인들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는 십자가 사건이 지혜롭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 모두를 향하여 바울 사도는 단호히 선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입니다.

이 사실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 주님, 제게 십자가의 본질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아멘.


지혜 (2019년 1월 3일 목요일)

고린도 교회에 분파가 있고 분쟁이 있어서 사도 바울이 대단히 근심하고 염려하였습니다.

그런 데다 그들이 아직도 육신 가운데 있어서,(고전3:3)

영에 속한 사람에게 하듯 말할 수 없어 어린 아이에게 말하듯 하겠다고 공표하기도했습니다.(고전3:1)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기적을 요구하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지혜를 찾는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이 혼재해있었습니다.(고전1:22)


사도 바울은 이들을 권면하고자 다음과 같이 말문을 엽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5)
이제 바울'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기적이나 표적으로 보기에는 무력하거나 천박하게 느껴지고,

지혜로 보기에는 몹시 무식하고 비참하게 여겨지는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또 그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능력있고 가장 지혜로운 분임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항상 '십자가의 예수님'께 주목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빌2:5-12)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히12:1-3)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나 죽음을 이기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가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만이 하나님의 지혜, 능력, 사랑, 구원, 그리고 영광입니다.


+ 하나님, '예수 따라가며 복음 순종하여' 길과 진리와 생명 가운데 우리가 굳게 서기를 원합니다. 아멘.


묵상질문

 

-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멸망하는 자들에게와 구원받는 우리에게

각각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왜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습니까?

 

기도

 

-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 복음의 방식을 이해하고, 이 땅에서 복음을 받은 성도로 제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구원의 능력이라는 비밀을 알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구원의 감격을 노래하면서 십자가의 도를 따르게 하소서. 아멘.


약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주님, 바로 거기에서부터 우리가 당당합니다. 강하지 않고 약해서 우리를 선택하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능력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