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가공해서는 안 됩니다 2013년 10월 29일 화요일
고린도전서 2:1~9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1)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2)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3)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있는 지혜의 말도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4)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5)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6)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겼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7)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9)
성경 길라잡이
복음은 그 자체로 능력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교회가 시장이 되어 복음을 판매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유혹할 만한 것들로 포장하고, 복음의 핵심을 약화시켜
사람들의 거부감을 줄여 전하려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전하고,
바로 그 복음을 살아내어야 합니다.
그 지점에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가공해서는 안 됩니다 2013년 10월 29일 화요일
복음을 가공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세상의 지혜나 웃음거리로 전락해서는 안 되며,
축복과 성공의 맘몬복음으로 대치되어서도 안 됩니다.
어떤 것도 첨가되거나 가공하지 않은 날 것 그대로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거칠고 설득력이 없어도,
우리를 살리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는 십자가의 복음을 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방식 역시 복음의 방식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제국의 방식이 아닌 십자가의 방식으로 전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깊게 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논증을 개발하는 것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복음 선포의 방식은
권력과 부와 종교적 인기의 유혹을 거부하신 예수님을 따라,
1) 자기를 부인하고 가해자까지 품으며,
2) 성도의 하나 됨과 섬김을 통해 교회가 대안공동체가 됨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진리에 대한 진정한 통찰은 실천적 참여로부터 나오며,
바른 배움은 행위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2016년 5월 16일 월요일 (고전 2:1~11)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말 그대로 복음의 핵심이지요.
그는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고전2:2)
그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 변론하지도 논쟁하지도 않았습니다.
전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습니다.(고전2:1)
우리가 잘 알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 십자가의 사건을 알기 전 사도 바울은
복음의 정반대편에 있던 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을 체험하고 난 후 복음의 정방향에 선 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의 지성과 이성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하늘의 지혜였습니다.
하늘의 지혜가 열릴 때 인간의 지혜는 필요없어집니다.
필요없어졌는데도 인간의 지혜를 내세우면 그때 하늘의 지혜와 충돌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갈등'의 원천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충돌을 극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앎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습니까?
바로 지금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을 구합시다.(고전2:4)
부르심을 따라 살렵니다 2016년 1월 8일 금요일 (고전 2:1~10)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크리스천에겐 두 종류의 부르심이 있다고 분류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구원으로의 부르심이요, 둘째로 소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존재'에 관한 문제라면
소명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목적'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한편 소명이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모든 크리스천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마다 소명의 내용은 다를 것입니다. 허나 모든 크리스천의 소명은 한 가지로 귀결될 것입니다.
다름 아닌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 그 사명 하나만으로 충전되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대로 자신의 생명조차 아끼지 아니하고 그 소명을 감당했지요.
한 모라비안 선교사가 십자가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지로 떠나며 이런 고백을 남겼다 합니다.
"누군가 나의 삶을 베어보라. 예수의 피가 솟구칠 것이다.
누군가 나의 심장을 찔러보라. 예수의 심장이 고동칠 것이다.
예수의 피, 예수의 심장 때문에 나는 선교지로 가노라."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에게도 분명한 주님의 부르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 부르심을 외면하지 말고 따릅시다.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갑시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2018년 5월 29일 화요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누리는 여러 가지 행복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큰 것이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위해 쓰임받는 행복'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전파를 위해 쓰임받는 것만큼 더 큰 행복과 기쁨은 없는데
그런 면에서 보면 바울 사도는 참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그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모습이 나오는데
1절에 보면 복음을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이나 헬라 사람들의 지식, 설득력있는 지혜의 말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말씀하는데, 거기엔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 오기 전에 아덴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과거에 배운 헬라의 학문을 이용하여 아덴의 철학자들과 변론을 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말쟁이라는 별명만 얻었을 뿐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후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오게 되었기에 마음이 굉장히 무거웠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그때 바울의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는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전했고
전도의 열매를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 하나님, 사람의 말과 지혜가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전하게 하소서. 아멘.
성령으로 충분합니다 (2018년 9월 20일 목요일)
바울 당시 헬라 사람들은 자기의 주장을 펴고자 할 때
세련되게 다듬어진 철학, 화려한 수사학, 치밀한 논리학 등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언어와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세련되고 탁월한 내용으로,
흔히 말하듯 '시청각적으로 잘 전달될 것 같은 내용으로' 복음을 재구성하여 전달하면 더 잘 전달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의 유일한 내용으로 특정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파할 때는 훌륭한 말, 그럴듯한 말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 있으면 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는 언제나 성령이 함께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설교자가 아무리 말주변이 좋고, 전도자가 아무리 웅변술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 복음에 힘이 없습니다.
세상 방식으로 '말이 되고' 세상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더 있도록'
매력적으로 복음을 재구성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하의 바울도 복음전파 과정에서 두려워 떨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같은 전도 초보자들이 전도를 앞두고 두렵고 떨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그렇더라도 세상 방식으로 복음을 치장하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에 힘입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분합니다.
+ 주님,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모든 일을 수행하게 하소서. 아멘.
믿음 (2019년 1월 4일 금요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스스로를 낮추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고전2:3)
그러면서도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지식과 교만을 꾸짖습니다.
누구보다 많이 배워 학식이 깊을 뿐 아니라 혈통과 배경과 경력을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바울 자신이었습니다.(빌3:3-6)
그러나 그는 그런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며 다 버렸지요.(빌3:7-8)
예수님을 만나 그의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야만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3:3-8)
육신의 조건, 노력, 속성은 하나님을 기쁘시게도 못하고 영광을 돌리지도 못합니다.(롬3:23, 8:5-8)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난다긴다 하는 당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음모에 협력했던 것이지요.
믿음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지식·지혜와 무관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 그분의 영광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그 자리에 우리 믿음이 세워져야 합니다.(고전3:10-11)
예수님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히12:2)
우리가 어디에 발딛고 서있느냐가 언제나 중요합니다.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 능력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서
그것을 근거로 하여 우리의 믿음을 세워가야하겠습니다.
+ 주여! 내게 믿음을 더하여주소서. 오직 주님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소서. 아멘.
묵상질문
- 바울은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왜 두려워하며 떨었을까요?
- 바울이 설명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관련된 표현들을 찾아보세요.
기도
- 십자가의 복음의 내용과 방식을 실천으로 깨닫게 도와주십시오.
-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에게 바울의 심령을 부어주십시오.
- 오늘 하루 성령의 능력으로 힘있게 복음을 증거하게 하소서. 아멘.
우리를 부르시는 주여, 우리를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을 위해 사용하여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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