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거듭남이 뭔가요?
<요한복음 3:3,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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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봅.시.다>
‘거듭남’이라는 말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자주 듣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목회자들은 설교에서 자주 ‘거듭나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성도들의 간증에서도 자신의 삶의 변화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말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에 대한 말들은 많이 하지만 정작 ‘거듭남’이 무엇인지 모호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서 거듭남에 대해 직접 언급한 것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에 잘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3:1이하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 라고
반문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거듭나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육체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한 번 태어난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기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에 의문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육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이 말한 ‘거듭남’은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성경이 말하는 인간 존재의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선언합니다.(롬3:23)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도 예외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모든 사람들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죄인이기에
죄인으로서 한계를 가지고 살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을 성경은 옛 사람,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한 ‘거듭난다’는 것은 죄인의 존재에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임으로써
옛 사람은 죽고 이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은 다른 말로 ‘중생’이라 표현되기도 합니다.
중생으로 번역된 성경의 헬라어 단어는 ‘팔링게네시스’입니다.
‘팔링게네시스’는 신약성경에서 두 번 나옵니다. (마19:28, 딛3:5)
이 단어의 뜻은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로 거듭난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팔링게네시스’와 유사한 신학적인 용어로는 ‘칭의’가 있습니다.
칭의는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말로써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중요하게 취급되었고
중요한 신학적 위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칭의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선고받음’으로
옛 피조물의 상태, 즉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인간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이신칭의교리를 체계화했습니다.
신학의 역사에서 칭의는 중생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고,
회심과 중생을 합친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칭의와 중생이 유사하게 사용되며
교파에 따라서 칭의를 중생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거듭남’이라는 표현은 교리적으로 칭의, 혹은 중생과 유사한 의미입니다.
하지만 ‘칭의’에 대해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칭의는 하나님에 의해 죄인인 인간이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이지,
인간이 정말로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중생이 되어도 여전히 ‘의인인 동시에 죄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로는 의로움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한 인간의 어떤 행위 때문에 의로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이신칭의의 의로움은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에 의한 의로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의로움은 인간에게는 낯선 의로움이고 수동적인 의로움입니다.
인간이 의로워지며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은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에 의해 의로움을 얻는 인간은 그 자체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칭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칭의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변화의 시작일 뿐입니다.
칭의를 받았다는 것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고,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로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칭의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일생을 통해 그리스도를 향한 지속적인 성화의 과정을 얻게 됩니다.
칭의가 수동적인 의라면, 성화는 신도의 자발성이라는 의미에서 능동적인 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칭의를 받은 성도가 성화의 과정을 거친다고 해서 칭의와 성화를 분리해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칭의와 성화를 시간적인 순서로 보기도 합니다.
칭의가 먼저 일어난 후 성화가 뒤따라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죠.
또 칭의를 순간적이고 일회적인 것으로 보는 반면,
성화는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 은혜로 칭의를 받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회심이 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거듭남이며 중생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바로 성화의 과정을 걸어가게 됩니다.
칭의와 성화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칭의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것을 의무로써 하지 않습니다.
성화의 길은 오직 능동적이며 기쁨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성화는 거듭난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삶입니다.
<대.화.합.시.다>
질문: 거듭남의 체험이 있으면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가요?
답변 : 거듭남의 체험은 분명 귀합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가지는 거듭남의 확신이나 체험으로 구원이 완료된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 세상을 살면서 구원을 완료형으로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거듭남을 체험한 후에도 실족해서 그리스도를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듭남의 체험 후에도
더욱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성화의 길을 향해야 합니다.
<묵.상.해. 봅.시.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나에게 옛 모습과 다른 새로운 모습이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고후5:17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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