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세상

[책]'파수꾼'- ‘이강백 희곡전집1’

colorprom 2020. 9. 26. 14:25

[동서남북] 이리 떼와 파수꾼

권력자들이 “이리 떼다!” 고함칠 때는 의심해볼 일이다
거짓말로 공포를 불어넣고 양철북을 두드리지는 않는지

 

박돈규 기자

 

입력 2020.09.25 03:00

 

박돈규 주말뉴스부 차장

 

주말에 외출을 자제하라는 재난 문자를 받았다.

대학 연극반 시절에 읽은 ‘이강백 희곡전집1’을 오랜만에 다시 꺼냈다.

극작가 이강백이 1973년 겨울에 썼다는 ‘파수꾼’이 눈길을 붙잡았다.

수능 수험생에게는 필독 희곡으로 꼽힌다.

 

무대는 황야. 파수꾼 '가' '나' '다'가 등장한다.

'가'는 아주 오래전부터 높은 망루 위에 올라가 있다.

멀리 볼 줄 알고 한 번도 실수를 한 적이 없는 전설적인 파수꾼이다.

“이리 떼다! 이리 떼가 몰려온다!” 그가 소리치면

망루 아래에서 '나'와 '다'가 힘차게 양철북을 두드린다.

“북소리 중지! 이리 떼는 물러갔다!”는 외침이 들릴 때까지.

이들의 수고와 희생 덕에 마을과 주민들은 안전하다.

 

'다'는 겁이 많은 풋내기지만 언젠가 '가'처럼 훌륭한 파수꾼이 되고 싶어한다.

이 소년 파수꾼이 밤에 불안하고 궁금한 나머지 망루 위로 올라가면서 불편한 진실이 드러난다.

새벽의 황야는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하다.

그때 부동자세로 잠을 자던 '가'가 발작처럼 외친다.

“이리 떼다! 이리 떼가 몰려온다!”

그러나 어디에도 이리 떼는 없다.

 

이강백은 이솝우화 ‘양치기 소년’에서 영감을 얻어 이 희곡을 지었다.

수험생들은 ‘파수꾼’을 배울 때

“정의와 진실이 은폐되고 왜곡된 사회에 대한 풍자”

“1970년대 한국 정치 상황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같은 해석에 밑줄을 쫙 긋는다.

 

외부에 이리 떼(북한)를 만들어 공포를 불어넣고 자유를 억압하는데

주민들은 ‘보호받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 아이러니를 파악해야 정답을 고를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1970년대를 증오하면서 닮아가는 것 같다.

적(敵)은 이제 내부에 있다.

‘20년 집권’ 운운하는 여당은 걸핏하면 “적폐 세력이 돌아온다!”며 공포를 조장한다.

위안부 피해자를 돕는 척하며 등쳐 먹은 자를 비판하면 “친일 세력이 준동한다!”고 양철북을 두드린다.

법무부 장관 아들 특혜 의혹엔 “쿠데타 세력의 정치 공작이다!”라며 적반하장이다.

적폐’와 ‘친일’과 ‘쿠데타’는 이 정부가 애용하는 이리 떼 3종 세트다.

 

현실은 ‘파수꾼’이 풍자한 그 마을 못지않게 허망하다.

여권부동산 문제에 관한 한 ‘양치기 소년’이 된 지 오래다.

집값 통계까지 왜곡한다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

서울시장 성추행 사건은 ‘피해 호소인’이라는 창작으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뀔 뻔했다.

공익 제보자인 20대 청년을 범죄자로 단죄하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실정을 비판하면 이리 떼로 몰아가니 냉소만 쌓인다.

 

‘파수꾼’에서 촌장은 마지막에 등장한다.

파수꾼과 이리 떼의 진실을 고발하는 편지를 받고 현장에 납신 것이다.

독재자에게 꼭 총칼이 필요한 건 아니다.

이해심이 많아 보이는 촌장은 정중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다'에게 말한다.

 

“얘야, 이리 떼는 처음부터 없었다.

없는 걸 좀 두려워한다는 것이 뭐가 그렇게 나쁘냐?

사람들은 이리 떼에 대항하기 위해 단결했다. 질서를 만든 거야. 그 질서가 마을을 지켜준다.

파수꾼은 사람들을 위해 고귀하게 희생한 거야.

이 모든 걸 헛되게 하고 싶진 않겠지?”

 

연극은 쓸모없고 비이성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거꾸로 말하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다시 읽은 ‘파수꾼’은 지금 이 시대에도 통하는 이야기라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좋은 연극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훈계하지 않는다.

저렇게 살아도 되는지 관객 스스로 반문하게 한다.

 

권력을 쥔 자들이 “이리 떼다!” 고함칠 때는 의심할 일이다.

공포를 조장하며 양철북을 두드리지는 않는지.

코로나 사태마저 이리 떼로 부려 먹진 않는지 경계할 일이다.

 

희곡 '파수꾼'을 비롯해 1970년대 초기작들이 수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