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부정한 몸으로 성찬에 참여해도 되나요?
<레위기 20:26>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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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봅.시.다>
성찬은 개신교에서 아주 중요한 의식입니다.
가톨릭은 일곱 가지의 성례(성세, 견진, 성체, 신품, 혼인, 고백, 병자성사)를 가지고 있으나,
개신교는 세례와 성찬 두 개의 성례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성례는 직접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찬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며,
성찬을 통해 직접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하고, 우리는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칼뱅은 성찬을 주님이 우리 마음에 인쳐주시는 외적 표시이며,
우리의 연약한 신앙을 북돋워 주기 위한 선한 약속으로 이해했습니다.
성찬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종교개혁가들과 가톨릭 사이에서 논쟁의 쟁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가톨릭은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고해성사를 합니다.
고해성사가 하나의 형식이 된다면 문제이지만 원래 정신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고 죄를 고백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매우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개신교는 고해성사나 죄의 고백은 같은 제도적 절차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는 조건이나 자세에 대해 누구나 궁금해 하고 의문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성찬에 참여하는 준비 과정을 각 개인에게 맡긴 셈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느냐 하면
종교개혁가들은 죄의 고백과 죄 사함을
하나님과 당사자 사이의 직접적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의 이런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앞에 신실하게 설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책에 대한 분명한 고백과 개인적인 결단이나 준비가 없다면
성찬에 앞서 누구나 바람직한 자세에 대한 문제에 부딪힐 수 밖에 없습니다.
죄에 대한 고백과 죄 사함이 하나님과 당사자 간의 직접적인 것이라는
개신교의 원래 정신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찬에 대한 철저한 준비 없이 성찬에 참여하다 보니
오늘날 성찬은 하나의 형식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 올 때 그날 성찬이 있는지도 모르고 와서 아무런 생각없이 성찬에 참여합니다.
이렇게 아무런 준비없이 참여한 성찬은 아무런 감동없이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행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의 모든 삶과 가르침이 녹아있는 예전입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결단입니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놀라운 은혜의 자리에 준비없이 나아가는 것은 결코 우리의 신앙에 유익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성찬에 참여할 때 ‘부정한 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부정한 몸이라고 하면 먼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허물이나 죄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상태로 아무런 의식없이 성찬을 대하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는 아닙니다.
이 말은 좀더 넓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즉 ‘부정한 몸’은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와 죄책 고백이 없는 상태로 보면 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1:28에서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찬에 임하는 율법적인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찬에 참여하는 자의 신앙적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성찬에 참여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성찬에 임하는 자는 자신을 살펴보고 이와같은 신앙의 태도로 성찬에 참여하라는 말씀입니다.
성찬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삶겠다는 자기 고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고백은 성찬에 임하기 전에 우리 자신, 우리 주변, 우리가 속한 교회 공동체를 둘러보게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속한 교회가 주님의 뜻을 벗어나면 ‘공동체’가 부정한 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파당과 음행과 우상숭배, 세상 법정에서의 다툼과 같은 죄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분열로 몰아갔습니다(고전11:17-21)
이때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먼저 자신을 살펴보고 성찬에 참여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의 권면은 한 개인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 전체를 향한 ‘공동체’를 향한 것입니다.
성찬을 준비된 가운데 맞이해 보십시오.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준비없이 형식적으로 참여한 성찬은 공허한 성찬이요, 감동없는 성찬입니다.
그러나 기도로 준비된 성찬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놀라운 경험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대.화.합.시.다>
질문 : 성찬에 참여하면서도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성찬은 의미가 없는 것인가요?
답변 :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찬은 그 자체로서 주님이 제정하신 것이며 신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그의 오심에 대한 희망을 확인하고 선포하며 결단하는 중요한 예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지 않는다고 해서 성찬의 의미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찬의 바른 의미를 알고 준비 가운데 참여하게 된다면,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결단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묵.상.해. 봅.시.다>
앞으로 성찬을 대할 때 스스로 어떤 준비를 할지 구체적으로 정리해서 기록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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