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남용목사님

예수의 권한에 대한 논쟁 (마태복음 21장 23절~32절)

colorprom 2019. 11. 5. 12:39

20191105 화


예수의 권한에 대한 논쟁


마태복음 21장 23절~32절   


본문은 고난주간 중 둘째날에 성전에서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논쟁의 핵심은 “예수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안에서 행하신 일들,

성전 정화사건, 병고침, 가르침의 사건을 직접 목도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이 신적 권세도 없이 불경스러운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합니다.
 

유대지도자들의 이같은 행동은 

예수님의 행위를 본격적으로 제지하기 위한 구체적 조사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종교와 정치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백성들의 환호를 받고,

자신들의 존립 기반인 성전 체계를 공공연히 위협하자, 예수님을 음해할 묘수를 찾고자 예수님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일을 하느냐”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거꾸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25절)

이 질문은 너희가 세례요한을 참된 선지자로 인정하는가 아니면 거짓 선지자로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 시점에서, 세례요한을 언급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세례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을 참된 선지자로 인정한다면 

그는 예수님도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면, 예수님의 권위도 부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님의 반문에 의해서 올무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신적 권위를 인정한다면, 요한이 증거한 예수님의 신적 권위도 인정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낸 선자자로 믿지 않는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크게 원망을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올가미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던 종교지도자들에게 세례요한이 증언했던대로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포도원의 두 아들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예"로 대답했지만, 나중에는 불순종한 큰아들, 

처음에는 "아니오"로 대답했지만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한 둘째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유대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겉으로는 순종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순종하지 않은 큰 아들임을 드러냅니다.

반면에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거부했지만,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한 둘째아들과 같은 세리와 창기들은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큰아들이든 작은아들이든 하나님앞에서 모두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출발점에서,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하시면서,

회개에의 초청에 응답한 사람들은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은혜를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선민이라 자처했던 유대백성들과 지도자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마지막까지 회개치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의 도"를 거부하고 멸시합니다.


천국에 가까이 있다고 생각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가장 멀다고 생각되던 사람들이 구원받는 역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그동안 훈련했던 모든 경건이 헛것이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 이순간 “아멘”으로 반응하며, 예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아니요”를 외치며,

주님의 뜻을 배척했기에, 과거의 모든 “예”가 무효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초점은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되는 삶을 뉘우치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에 아멘으로 순종하며 사는 삶인 것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먼저 믿은 자이든, 나중에 믿는 자이든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의 나의 신앙고백입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을 사는 것처럼, 하나님앞에서 종말의식을 가지고, 주앞에서 살아갈 때,

주님의 구원의 초청을 최우선으로 선택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