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31 목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다
마태복음 21장 1-11절
마태복음 21장부터 27장까지는 예수님의 지상생애 마지막 한주간,
즉 고난주간 전후에 있었던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을 기록하였고,
이것은 고간 주간 첫째 날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특히 본문은 구약에서 예언된 말씀들이 예수님의 상징행동(sign act)을 통해 성취되는데,
이는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오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임을 확고하게 드러내어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감람산 근처 벳바게라는 마을에 이르렀을 때,
두 제자를 벳바게마을에 보내시면서,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예수께로 끌고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 9장 9절)의 성취입니다.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섬김의 왕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입니다.
예수님에게 남은 한 주간의 삶이, 십자가 죽음을 향한 고난의 여정임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기치 않았던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의아해할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3절).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주”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직역하면, “그것들의 주인”이란 뜻입니다.
이 말의 뜻은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 되신다는 예수님의 주권을 표현해주는 말씀입니다.
나에게 주신 생명,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오라하시면, 모든 것을 두고, 주님앞에 가야하는 존재가 피조물된 인간의 삶입니다.
나에게 주신 재능 뿐만 아니라,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청지기 의식을 갖는 것이
신앙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주님이 쓰시겠다”할 때 주님의 것 주님께 드립니다는 믿음의 고백으로 겸손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62장 11절에서 예언된 것처럼,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입성하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소리높여 찬송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가까운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9절).
하나님과의 인간 사이의 깨어진 평화를 회복시키시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과의 깨어진 평화가 평화의 왕,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온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도다” (이사야 1:3)는 말씀과 같이,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과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십자가의 대속의 뜻을 깨닫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서광은 예수님의 순종을 통해 비추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패역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부패하여, 세상 어디에도 희망을 찾을수 없을지라도,
구원의 빛, 생명의 빛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비추어, 참된 소망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힘써 전하며,
나의 주인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감사함과 담대함으로 오늘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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