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개체(個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보면 능력으로 부르시는 예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참 못나서 하나님이 누구를 써서 높이면 그 사람이 능력이 있어서 부렀다고 말을 합니다만,
이것처럼 못난 생각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의 능력을 쓰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쓰시는 이유는 어떻게 은혜로우신지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못난 자를 쓰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직접 다메섹 도상에서 스카우트하신 인물 아닙니까?
우리는 "거봐라, 하나님 앞에 쓰이는 사람들은 KS 마크다." 이렇게 나갑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쓰실 때, '내가 이만큼 실력이 있으니까 나를 쓴다.' 고 오해할까봐
바울을 놔뒀다가 스데반을 죽인 다음에야 부르셔서,
하나님 없으면 실력이 있고 능력이 있어봤자 아무것도 아님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부름 받기 전까지 바울의 실력은 사람 죽이는 실력밖에 안 됐습니다.
한국 교회 직분 및 재정에 관한 제문제점과 갱신방안<소논문>
[32] 갱신(更新)
선교적 사명만이 교회의 가장 우선적이고 유일한 목적이라는 것은 성경적 요구의 전부는 아닙니다.
행위보다 성품을 요구하는 내용이 더 많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개명을 지킬 때 세상이 우리의 제자됨을 안다고도 말씀합니다.
교회는 능력이나 방법론보다 올바른 신앙적 인격을 키우는 데 힘써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직분과 재정에서의 문제점들은 다양합니다.
직분에 대한 특권의식이나 비성경적 직분관에 의한 세상적 임무 수행,
직분을 신앙 성취의 목표로 삼는 신앙관, 그리고 기복신앙과 연계된 헌금 강요, 재정 집행의 불공정 등이
바로 그런 예들입니다.
그러나 이상의 여러 일차적인 문제들보다 더욱 큰 문제는 직분관을 포함해서
교회 자체의 목적과 그 목적의 성경적 수행방법에 관한 근본적인 이해 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내의 여러 문제들이 교회 지도자의 의도적인 자기 욕심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여기서 따질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 지도자와 교인들이 비성경적인 교회관을 가짐으로써 야기되는
사명감과 헌신에 관련된 부작용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교회의 목적과 사명을 성경적으로 정립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가 먼저 정립되어야 교회는 그 목적과 사명, 그리고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과 수단 등을
비로소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목적과 사명, 그 목적을 수행하는 방법상의 문제들을 중심으로
교회 내의 여러 문제들을 비평하며 동시에 갱신방안도 제시해보려 합니다.
교회의 사명과 그 사명을 수행하는 방법은 원리상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는 것이므로
그것을 굳이 둘로 나누어 생가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들은 원리만으로도 그 문제의 핵심이 규명되기도 하지만,
또 어떤 문제들은 원리 면에서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으나
방법과 수단에서 그 실상이 더 잘 규명되기도 하기 대문에,
중복된 감이 있으나 굳이 둘로 나누어 생각하고자 합니다.
빛과 소금, 행위보다 성품이 먼저
한국교회 내에서 제일 활발한 활동은 선교사업이며,
따라서 재정과 직분도 이 선교사업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재정의 많은 부분이 국내 외 선교에 할당되며,
교회직분도 구령사업에 필요한 훈련을 가장 많이 요구하고,
또 실제로 교인들도 이 일을 위해 훈련을 받습니다.
이러한 선교적 사명은
특히 마태복음 28:18 이하에 주님께서 친히 주신 대위임령에 근거하여
지도자와 피교육자 모두에게 당연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엔 조금 더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선교적 사명만이 교회의 가장 우선적이고 유일한 목적이라는 것은 성경적 요구의 전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약의 서신서에는 신자의 신앙활동을 격려하며 지도하는 내용 가운데
선교적 내용이 가장 우선적으로 중시되거나 가장 많이 언급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교회에 요구하는 성경적 내용들은 거룩과 인내와 충성 등으로,
신앙의 외적 활동과 어떤 행위이기보다 내적 성장과 인격적 수준을 요구하는 내용이 더 많습니다.
행위보다 성품을 요구하는 것이 성경적 관찰의 결과인 것입니다.
'겸손, 온유, 참음, 사랑, 용납' (엡4:2), '
인자와 용서' (엡 4:32), '다툼과 허영을 버리고 겸손할 것' (빌 2:3),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어 사랑과 자비를 베풀며 검손하고 온유할 것' (골 3:5-17)이 강조됩니다.
즉 성경의 요구는 어떤 일을 수행하는 능력보다 신앙인격을 완성하는 성품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살전 4:3).
물론 교회가 주님의 대위임령을 중시하고 최우선적 사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결코 잘못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가 주님은 대위임령뿐만 아니라 새 계명도 주셨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4-35).
새 계명의 다른 측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선교적 사명은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는 직접적 행위만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새 계명에서는 이 선교적 사명의 성취방법에 다른 측면이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즉 주님의 제자된 증거로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님께서 새 계명 안에 내포시킨 선교적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원색적인 전도와 달리 신자된 새로운 성품으로 증거되는 선교방법은
한국교회에서는 별로 시도되지 않고 있으나 여러 성경 구절들이 이 사상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행실을 선하게 가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벧전 2:11-12).
"너희는 빛이요 소금이다. 이같아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3-16).
우리의 우리된 본분의 충실함 여부, 곧 신앙 인격과 성품의 성숙도가
빛과 소금의 직분을 잘 감당해내는 데 있어 중요한 평가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가 오직 하나의 행위나 방법으로만 이루어지게 되면, 그 결과의 유무나 다소가
곧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는 데 요구되는 실력과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후자의 원리가 득세하면
교회는 결과를 많이 얻어내기 위한 원인과 수단을 제공하는 길로 직분과 재정을 요구하게 되고,
또 훈련도 방법론과 능력 키우기 일변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적 헌신과 주를 사모하는 열심과 충성이 결국 많은 돈과 능력으로 귀결되어,
많은 헌금을 위한 부와 많은 결과를 얻기 위한 기술과 실력만이 높이 평가받게 됩니다.
교회 내에 늘 말썽의 소지로 되어 있는,
돈이 있어야 장로가 된다든가, 공부를 많이 한 박사여야 훌륭한 목사라는 식의 오해 등은
바로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는 부작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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