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明齋 선생을 추억하며 (조용헌 교수, 조선일보)

colorprom 2019. 9. 9. 16:42


[조용헌 살롱] [1210] 明齋 선생을 추억하며


조선일보
                         
             
입력 2019.09.09 03:14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

유럽의 유서 깊은 성당을 구경하면서,
그 성당 지하에 도력이 높았던 옛날 신부님들의 유골을 모셔 놓은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풍수 사상의 핵심이 백골감응설(白骨感應說)이다.
이를 보면서 그 도인 신부님들의 혼령이 그 성당과 신자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수백 년 된 고택과 종택을 방문할 때마다 같은 생각을 한다.
그 집안의 선대 큰선비 혼령들이 후손을 지켜보고 있다고 믿는다.
풍수 사상조상 숭배가 결합한 나의 조잡한(?) 신념 체계 때문이다.

충남 논산의 노성리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 고택을 갈 때마다
명재 선생의 생전 처신과 가르침을 생각한다.

먼저 명재'벼슬 환장병()'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조선조는 과거 합격해서 벼슬하는 것이 최고 가치였다.
벼슬하려고 환장한 사회였다.
명재는 죽을 때까지 벼슬을 거절하였다. 임금이 여러 가지 벼슬을 준다고 불렀지만 끝까지 가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우의정 자리도 사양하였다.
일생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문을 40차례 이상 임금에게 올렸다.
일생을 처사로 일관하였다.

둘째는 지역 차별을 해소하려고 노력한 점이다.
벼슬을 사양하던 그가 딱 한 차례 벼슬을 해볼까 하고 서울 턱밑의 과천까지 올라간 적이 있다.
1683년 54세 때 일이다.
과천에서 친구이자 당시 신망이 높았던 박세채와 밤새 토론하였다.
토론 주제는 '내가 입각하면 노론 정권에서 차별받고 있는 영남 남인들을 등용시킬 수 있느냐'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영남이 심하게 천대받던 시절이었다.
실세인 박세채로부터 '장담 못 한다'는 답변을 듣고 바로 보따리 싸서 논산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호남 출신인 필자는 예전에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곤 하였다.

셋째는 '토한 논'이다.
당시 도지사, 시장, 군수가 부임할 때마다 명재 선생에게 인사를 갔다.
선생과 겸상해서 식사를 마치고 떠날 때는 300m 거리에 있는 논에다가 먹은 것을 토하곤 하였다.
꽁보리밥에다가 깻잎, 볶은 고추장, 김치가 주 메뉴였다.
벼슬아치들이 평소 고량진미를 먹다가 갑자기 험악한 음식을 먹으니까 배 속에서 감당을 못했던 것이다.
VIP 방문객들이 음식 토한 지점을 '토한 논'이라고 불렀다.

넷째는 '우리 집안 윤씨들은 양잠을 하지 말라' 선생의 엄명이었다.
서민 먹을거리인 양잠을 양반 집안에서 해 버리면 서민들 밥 굶는다는 게 이유였다.

선생의 혼령은 아직 살아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9/08/201909080163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