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얼중얼...]

나 하나만 참으면 모두가 편하다던...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 조선일보)

colorprom 2019. 6. 1. 20:12

2019년 6월 1일, 토요일


오늘자 조선일보 [별별다방으로 오세요!]의 사연.

어쩌면 이렇게 우리엄마 사연을 그대로 그려냈을까?

6월 5일, 엄마 4년 째 기일...에 맞춰서 엄마 마음을 그대로 전해준 글이 신기하게도 위로가 된다.


더우면 더울수록, 이 무서운 더위를 피해 하늘로 이사가신 엄마 생각에 흐뭇하다(?!).

엄마, 잘 계시지요?  안 덥지요?  이제 기제사니 뭐니 다 잊어버리셨지요??? *^^*

엄마, 고마와요.  집안 분란없이 잘 지켜주셔서 고마와요.  그리고 미안해요.  엄마 뒤에 숨기만 했었어요...

엄마,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도 편히 모셔가세요...덜 힘드시게!  아버지 무서워하지 말고. *^^*


이제까지의 우리나라 가문은...밖에서 들어 온 잡씨 성, 며느리들의 희생으로 이어져왔다고 믿는다.

요즘 미혼자들이 많은 것도 엄마들의 희생을 봐 왔어서...아닐까.  으흠...쯧...에효...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나 하나만 참으면 모두가 편하다던... (1)


mrs****


2019-06-01

                


은공을 모르는 사람은 어쩌면 드물 겁니다. 갚아야 할 때에, 모르는 척 할 뿐이지요.

인간은 워낙 배은망덕한 존재입니다. 동시에 타인의 배은망덕을 미워하는 존재입니다.

배은과 망덕이란 말로 누군가를 덮어씌우기 좋아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애초에 은공의 가시밭길을 걷지 마시길, 은공의 그물을 엮지 마시길, 은공의 주판알을 튕기지 마시길...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보라고 한다면, 나는 열 살 무렵의 어느 일요일로 돌아가게 됩니다.

장소는 우리가 살던 옛집, 할머니의 방.

눈앞에는 오래된 미싱의 은색 바퀴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고,

할머니의 투박한 손가락이 노루발 주위를 바쁘고 오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홀린 듯 쳐다보고 있던 제 손에는

큰 회사에 취직한 막내고모가 첫 월급으로 사 보낸 바비인형이 들려 있겠지요.

실은 그 인형에게 입힐 옷을, 할머니는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단벌 드레스에 손때가 묻을까봐 인형을 만지기도 아까워하는 손녀를 위해

여벌의 인형드레스를 만들고 계신 것이지요.


때마침 부엌에서는 엄마의 도마질소리와 함께 고기 볶는 냄새가 풍겨오지만,

나는 재봉질 중인 할머니 곁을 떠나지 못합니다.

남동생이 마당에서 사촌들과 장난치는 소리, 큰고모가 아기를 어르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제 마음은 온통 할머니의 손끝에 가 있습니다.

자투리 천조각에 차츰 드러나기 시작하는 사람의 형상은 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세상에 우리 할머니만큼 솜씨 좋은 분이 또 계실까?

 

그 순간 느꼈던 가슴 뿌듯한 기분이 바로 행복감이겠죠.

그러나 그 행복의 이유가 꼭 인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 시절의 우리집은 늘 사람으로 북적였습니다.

아버지가 장손인데다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삼촌과 고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놀러왔습니다.

친척 어른들의 방문도 심심찮았는데, 그럴 때면 온 집안에 음식냄새가 진동했죠.

항상 똑같은 것 같으면서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 어른들의 대화는 계속되고,

아이들은 그 틈바구니에서 싸우고 삐치고 금방 화해를 했습니다.

그때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저는 정서적으로 참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라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지금 제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정서만 생각한다면, 역시 대가족이 답이라는 생각도 가끔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을 돌아보면 고개를 가로젓게 되지요.


달랑 네 식구이지만, 살림이라는 걸 해보곤 알았습니다.

가족의 평범한 행복을 위해서는 누구 한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수고와 인내가 끝없이 요구된다는 것을.

네 식구만 해도 그 역할이 버거운데, 대가족이면 어떨까요?

과연 그 부담이 여러 사람에게 골고루 나눠질까요?

 

결혼을 하고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누렸던 행복에는 누구도 말해주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는 것을요.

사촌들과 마당에서 숨바꼭질을 하는 동안, 부엌에서는 아이들 간식을 만드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큰고모부가 부추김치 맛있다고 한 마디 하시면, 얼른 가서 한 접시 더 내오고,

내처 돌아갈 때 들려보낼 김치까지 싸두고야 마음을 놓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막내고모가 신랑감을 데려온다고 하면, 거금을 들여 장을 봐서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내야 하는 한 사람,

친척 어른이 제 머리 쓰다듬으시며 용돈 만원 주시면,

그분 주머니에 얼른 봉투를 찔러넣어드려야 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쩌다 할머니가 편찮으시면 줄을 잇는 문병객 접대에 진이 빠져,

할머니의 뒤를 이어 앓아눕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우리 엄마였습니다.

맏며느리, 올케, 형수라는 이름으로 나의 엄마가 그토록 고생을 했다는 사실도 안됐지만,

그보다 더 마음 아픈 건, 엄마의 수고를 저조차 잘 몰랐다는 점입니다.


어린 시절 풍성한 추억의 장면들 속에 엄마의 모습은 없었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수돗물소리, 이불 터는 소리, 채써는 소리, 전 부치는 냄새, 밥 되는 냄새,

걸레질 자국 따위로 엄마는 존재했죠.


그러고도 큰 불평이 없는 사람이 우리 엄마였습니다.


결혼을 하고 제 자신 맏며느리의 이름표를 달고 보니 그야말로 엄마란 사람이 새로 보이더군요.

잠깐의 시늉만으로도 이렇게 버거운 게 맏며느리 자리인데,

엄마는 수십 년을 어떻게 견디어 왔을까요?


나 하나만 참으면 모두가 편하다, 우리 엄마


그렇게 산 것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너희들이 잘 자랐으니 후회는 없다 합니다.


그럼 한 번 뿐인 여자의 인생 억울하지는 않냐고 물으면, 엄마는 이렇게 말하죠.

내 새끼를 내 맘대로, 내 손으로 키워보지 못한 거, 단지 그거 하나가 억울하네.

너희 남매는 어머님이 끼고 키우셨지.

나는 집안일 하느라, 어디 한번 물고 빨아볼 새가 없었고.

 

단지 그거 하나라고 엄마는 가볍게 말했지만,

내 남편, 내 자식하고만 오붓한 정을 나누며 살아보지 못한 아쉬움은 뼈에 사무치는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후회가 없다고 말하는 건, 나 하나만 참으면 모두가 편하다는 뿌리깊은 생각 때문이겠죠.


한때는 그런 엄마가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엄마로 인해 편히 지낸 사람들은 과연 엄마의 노고와 진심을 기억할까?

 

실은 몇 해 전, 부모님 모르게 제가 아버지 형제분들과 만나 할머니 문제를 상의코자 한 적이 있습니다.

엄마가 진단받은 병명부터 털어놓고, 건강관리에 전념할 수 있게 이제는 좀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할머니는 치매가 상당히 진행되어 혼자서는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태이셨죠.

그러니 형제분들이 돌아가며 모셔주시든지, 입소하실 수 있는 시설이라도 알아봐 달라고요.

 

어른들의 첫 반응은 착잡한 한숨이었습니다.

형님과 상의해보겠다고 작은 아버지가 말씀하시더군요.

하지만 저는 마음이 급했습니다. 그동안 쌓인 불신도 작용했죠.

이 어른들은 언제까지 우유부단한 우리 아버지 뒤에 숨을 생각인가?


결국 하지 말았어야 할 말까지 하고 말았죠.

한 달 이내로 엄마는 내가 모셔갈 테니 할머니는 고모들이 모셔가라고요.

제 말에 고모 한 분이 격분하시더군요.

배은망덕한 것. 할머니가 너를 어떻게 키웠니?

둘도 없는 맏며느리라고 네 엄마만 알아보고 찾는 분이야.

그런 노인을, 병원 다녀야 한다고 나 몰라라 해?

막말로, 암에 걸린 것도 아니면서?

 

엄마는 그 날의 일을 아직 모르십니다.

공교롭게도, 그 일이 있고 얼마 안 있어 할머니는 병원에 입원하셨고, 한 달을 못 넘기고 돌아가셨으니까요.

만일 엄마의 건강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제가 들은 말을 낱낱이 고해바쳤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순 없었죠.

오십년 가까운 노고를 물거품으로 만드는 진실을 굳이 알릴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그게 과연 고모들의 맨 밑바닥 진실이었는지도 의문이고요.

 

, 살다보면, 문득 궁금해지는 옛날 물건들이 있습니다.

할머니의 미싱은 어디로 갔고, 고모가 사준 바비 인형은 어디로 갔을까요?

우리가 살던 옛집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두가 아니라 해도, 그 집의 엄연한 주인은 우리 엄마였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집에 사는 동안 나는 행복했습니다.

할머니도 마음 편히 지내셨습니다. 마지막 그날까지...

 

그것만으로도 엄마의 노고는 헛되지 않았겠죠?

   


 

akf*****2019.06.01 16:03


한여자의 일생을 보는것 같습니다--저역시 그랬습니다
저의 엄마 역시 그랬습니다-
시제때 음식장만 하는 것 보면서--저는 물한방울 묻히지 않으셨죠
아들들~ 그냥 주워먹는 사람들은 몰라요--같은 여자들도 몰라요-
좋은곳에 가셔서 행복하실 겁니다
일복을 타고난 분들이죠--저는 후손들모두 행복하시길 바랄뿐입니다
자식들이나 엄마의 은공을 잊지 말고 기억하시기를 바랄뿐---^^
지난날 엄마의 모습을 보는것 같아 마음이 짠합니다


'[중얼중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로운 홈페이지  (0) 2019.07.01
이 세상, 주님께 맡깁니다! *^^*  (0) 2019.06.11
[노년]하나님, 우리나라를 잘 부탁합니다~*^^*  (0) 2019.05.26
황선배 투병 소식  (0) 2019.05.20
싹뚝 잘린 나무  (0) 2019.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