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주제: 유럽서 왜 민족주의 또 번지나
"유럽은 내전에 빠져들고 있다. 민족적 이기심이 우리의 단합을 대신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올 4월 유럽의회 연설에서
확대되는 유럽연합(EU) 회원국 내 '민족주의'와 유럽합중국을 지향하는 '유럽주의자'들 간의 대결을
'내전'에 비유했다.
마크롱은 '유럽 시민'을 키우자며 유럽주의를 호소했으나,
3개월 뒤 스테프 블로크 네덜란드 외무장관은 헤이그에서
"다민족·다문화 구성원이 원래 주민들과 화합해 사는 사회가 세계에 있느냐.
인간은 유전자 깊숙이 '확정된 집단'을 원한다"며 민족주의를 옹호했다.
세계 정치에서 국경을 초월하는 '통합'의 선봉으로 꼽혀온 EU에서 민족주의가 왜 다시 발흥하는 걸까.
이 '내전'은 회원국 국민 간의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하는 '솅겐 조약' 이행을 놓고 본격화됐다.
1985년 프랑스와 독일, 베네룩스(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등 5국의 국경이 닿는 룩셈부르크의 솅겐에서 인적·물적 통행의 자유 허용에서 출발한 '솅겐 지역(Schengen Area)'엔
그런데 올 7월 초 독일 정부가 남부 독일로 유입되는 아프리카·중동계 난민 차단 조치를 한 게 화근이 됐다.
난민이 들어오는 길목인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검문을 강화하고
난민을 오스트리아로 축출할 수도 있다고 하자, 오스트리아 정부가 발끈했다.
오스트리아도 자국으로 난민이 들어오는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와의 국경 통제를 강화하겠다고 나섰다.
솅겐 조약을 무력화하는 조치들인 것이다.
이달 현재도 솅겐 지역 내 6국은 테러 위협과 난민 유입을 이유로 선택적 검문을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인종과 민족적 특성, 피부색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유럽 정신과 달리,
각국 경찰이 도로와 철로에서 아프리카·중동계 승객만 우선적으로 '프로파일링'해 검문한다.
이런 '국경 강화'는 유럽 통합에 역주행하는 반(反)유럽주의의 상징이다.
◇1100조원의 '유럽 결속 펀드'도 효과 없어
'유럽 통합의 아버지'들은 솅겐 조약을 통해 유럽 각국이 미국 주(州)들처럼 이동이 자유롭게 돼
EU가 미국 같은 '하나의 연방국가'가 될 것으로 봤다.
두 차례 세계대전의 참화와 민족·언어적 차이도 이겨낼 것으로 기대했다.
뉴욕타임스(NYT)의 맥스 피셔 칼럼니스트는
"이 '거대한 실험'은 각국이 어렵게 성취한 민족적 정체성과 주권의 소중함을 간과했다"며
"난민 문제와 우파 포퓰리즘의 심층에는 뿌리 깊은 민족주의가 있다"고 했다.
대표적으로 구(舊) 유고연방에선 7국이 독립했고,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나뉘고,
영국의 스코틀랜드와 스페인의 카탈루냐가 독립을 추진하고 있다.
EU가 28개 회원국의 통합과 사회 기반 시설 확충을 위해
2000년부터 2020년까지 8580억유로(약 1104조원)를 들여 마련한 '결속(cohesion) 펀드'조차
유럽인의 마음을 사는 데 실패했다.
미국의 전후(戰後) 유럽 복구 계획인 '마셜 플랜'보다 8배나 많은 자금을 투입했지만
각국의 분리·민족주의 성향이 더 강화되고 있다.
일례로 프랑스에서 '결속 펀드'를 가장 많이 받은 노르파드칼레 지역의 현역 의원은
프랑스의 EU 탈퇴를 외치는 극우 민족주의 정치인 마린 르펜이다.
20억유로를 지원받는 영국 웨일스 서부와 웰시 밸리도
2016년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 투표에서 62%가 찬성 표를 던졌다.
◇향수·비무장화가 '민족주의' 다시 촉발
유럽 내 민족주의가 재흥하는 가장 큰 원인은 과거에 대한 '왜곡된 향수'이다.
독일의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억압적인 동독 시절조차 '형편은 좀 못했지만 모든 게 질서 있고 안정적이었다'
'최소한 무슬림에게 국경을 열지 않았다'"고 국민정서를 자극한다.
2016년 탈(脫) EU 주민 투표때 보리스 존슨 당시 외무장관 같은 탈EU파 정치인들은
'영국 민족주의의 우수성'과 '영국의 부활'을 외쳤다.
스웨덴의 극우 민주당은 "모든 것이 폐쇄적이고 동질적인 1960년대로의 복귀"를 약속한다.
지지부진한 유럽 통합 성과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도 요인이다.
영국 싱크탱크 '데모스'의 소피 개스턴 부소장은
"유럽 통합이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는 데다 불안한 미래에 대한 공포가 번지면서
각국 국민들 사이에 민족주의적 감정이 꿈틀대고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유럽의 민족주의 발흥은 지난 70년간 미국의 '안보'에 무임승차한 결과이기도 하다.
영국의 역사학자 이언 커셔는 최근 저서 '롤러코스터(유럽 1950~ 2017)'에서
"유럽 각국은 한때 30만 명에 달했던 유럽 주둔 미군이 제공한 평화에 의지해 신뢰하고 통합했지만,
미국이 빠지고 러시아의 신(新)제국주의, 이슬람 테러, 중동 내전, 미국과의 무역 갈등이란 위협이 닥치자
이미 비(非)군사화한 각국은 '더 큰 유럽' 을 거부하고 '작은 유럽'으로 웅크렸다"고 진단했다.
EU가 '유럽인'이라는 통합 정체성을 창출하는 데 실패했으며, 따라서 '민족국가 시대는 끝났다'는 진단은
너무 성급했다는 것이다.
'EU 반대' 극우 민족주의 정당들, 내년 5월 유럽의회 접수 노린다
헝가리 오르반 총리·佛 르펜 등 "의석 3분의 1 확보, 집행부 견제"
5년 임기의 의원 751명을 뽑는 유럽의회 선거는 지금까지 모두 8차례 선거를 치렀다.
회원국이 9국이던 1979년 61.9%였던 투표율은 줄곧 하락하고 있다.
2014년 선거(회원국 28국)에선 투표율이 43.1%였다.
각국 국민이 브뤼셀 소재 EU본부에서 '지시'를 내리는 EU에 대해 갈수록 환멸을 느껴
투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유럽 각국에서 교두보를 확보한 극우 민족주의 정당들이
내년 5월 23~26일 예정된 유럽의회 선거를 정조준하고 있다.
고조되고 있는 민족주의·반(反)유럽주의 정서를 동력으로 유럽의회를 점령하려는 의도에서다.
대표적으로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각국의 극우(極右) 민족주의 정당들이 유럽의회를 접수해
EU 집행부의 자유주의적 엘리트들을 철저히 견제하자"고 주장한다.
현재 유럽의회에서 '팽창적 EU'에 반대하는 의원들은 150여 명인데,
동조자를 모으면 총 의석의 3분의 1(250석) 확보도 가능하다고 BBC는 밝혔다.
오르반 총리
의 주장에는
이탈리아 극우 정당인 '리그당' 당수 겸 내무장관인 마테오 살비니,
오스트리아의 제바스티안 쿠르츠 총리,
'프랑스 우선주의'의 선봉장인 우파 '국민연합'의 마린 르펜 등이 동조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선거 핵심 참모였던 스티브 배넌도
유럽에서 '무브먼트(Movement)'라는 단체를 이끌며 이 민족주의 성향 정치인들과 협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