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대한민국 출범]

臨政과 건국 (이선민 기자, 조선일보)

colorprom 2018. 1. 4. 17:51

정부 수립 70년

臨政과 건국

올해는 대한민국정부 수립 70주년이다.
내년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을 사료로 살펴봤다.      

       
  • 편집 =뉴스큐레이션팀
               
입력 2018.01.04 09:41 | 수정 2018.01.04 09:46

1919년 3·1운동으로 터져 나온 민족적 독립 의지를 모은 임시정부 수립으로 시작된 대한민국 건국

1948년 정부 수립으로 완성됐다.

임정 요인들이 1940년 중국 중경에 자리 잡은 뒤 복국(復國)과 건국 작업을 본격화하고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는 과정을

당시 선언문·성명서·신문·회고록 등 사료(史料)를 통해 살펴본다.



이시영·신익희·지청천·이범석… 임정 요인도 建國정부 요직에


이번 기념일에는 우리 겨레가 거족적(擧族的)으로 대망하던 대한민국의 독립을 선포하게 된 만큼

특별한 감명이 없을 수 없다.

물론 우리에게는 남북을 통일하는 역사적 대과업과

국제 우방들의 정식 승인을 얻어야만 될 정치적 대사명이 남아 있는 만큼

앞으로 더욱 민족적 단결을 공고히 하고

삼천만 일심(一心)으로 이 중대난국을 돌파해 나가지 않아서는 안 된다."

1948년 7월 24일 대한민국정부 초대 정·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는 이시영 부통령.
/조선DB

대한민국정부공식 출범한 1948년 8월 15일 아침 조선일보는 1면에

이시영(1869~1953) 부통령기념사를 실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이래 법무·재무총장을 역임하며 임정을 지킨 원로 독립운동가인 그는 1945년 11월 환국한 뒤 대한민국정부 수립에 적극 참여한 대표적 임정 요인이었다.

그는 한말(韓末)엔 명문가 출신의 고위 관료로 민족운동을 벌였고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둘째형 이회영 등 6형제가 가산을 정리한 뒤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풍족한 삶 버리고 조국을 택했다, 이회영(李會榮)


신탁통치, 미·소공동위원회, 유엔 감시하 총선 등 커다란 쟁점이 제기될 때마다

격랑 친 정국에서 이시영대한민국정부 수립을 확고하게 지지했다.


그는 1948년 1월 북한과 소련이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入北)을 거부하자

남한 단독선거가 불가피하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나는 금일 이 시간까지나 금후라도 남북통일 독립국가를 염원한다.

그러나 약소민족을 부식(扶植)한다는 신호를 잘 지켜왔다면

미소공위(共委)가 2년 전에 한국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금번에도 소련이 종시 거부한다면 우리는 다 죽어가는 동포를 그대로 볼 것인가.

우리의 주권(主權)을 세워놓고 동포 구제와 군정 철폐의 긴급성을 전제 삼아

재남(在南) 이천만 대중의 멸절(滅絶)을 만회함에 급선 착수하는 것이 현실에 적합한 조처라고 본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 선포 - 1948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지 38년 만에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수립됐음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조선일보 DB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에 이어 제헌국회 의장이 된 신익희(1894~1956)는

임정 요인 중 반공(反共) 단정(單政) 노선을 가장 명확히 했다.


임정 출범 때 임시헌장을 기초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고 1943년 임정으로 돌아와 내무총장을 맡았던 그는

1945년 12월 환국 후 정치공작대행정연구위원회를 만들고 임정의 정치활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반공 의식이 강하고 국제 정세에 밝았던 그는

미·소(美蘇)의 역학관계나 남북한의 이념 분쟁을 고려할 때 통일정부 수립이 어렵다고 봤다.


절친한 사이였던 임정 외무총장 조소앙의 남북협상 참여를 만류했던 그는

제헌의원 선거에 참여해 경기도 광주에서 무투표 당선됐다.


임정 광복군 사령관 출신 지청천,
신생 대한민국 軍事토대 구축


이승만 정부 첫 내각의 무임소 장관 지청천(1888~1957)은 임정 산하 광복군 사령관 출신으로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군사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한말에 정부 유학생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한 그는

1919년 만주로 망명한 뒤 독립군 지휘관으로 혁혁한 활동을 보였고,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립되자 사령관에 임명됐다.


광복 후 중국에 남아 광복군 확대 책임을 졌던 그는

1947년 4월 귀국한 뒤 우파 청년단체들을 통합해 대동청년단을 만들었다.

그가 미 군정에 제출한 '건군(建軍) 계획서'는 당시 시국 인식과 국군 창설 구상을 보여준다.


"한국 문제에 관한 한 미국과 소련의 협정에 의한 해결은 불가능하다.

통일한국 수립에 국제적 추세가 유리하지 않은 상황에서 군대의 건설이 긴요하다.

다양한 청년단체는 대동청년단으로 통일됨으로써 한국 군대의 조직을 위한 계획이 추진될 것이다."


이시영, 1948년 1월 北·소련이 유엔 위원단의 입북 거부하자
"남한 단독선거 불가피" 성명


신익희도 "통일 정부는 어렵다"


지청천은 독립운동을 벌이면서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남북협상이 어렵다고 봤다.

그는 김구에게 평양으로 가지 말고 이승만과 힘을 합치라고 권유했다.

그는 제헌의원 선거 때 서울 성동에 출마해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됐다.

대동청년단은 당선자 12명을 내서

이승만의 독립촉성국민회(55명), 김성수의 한국민주당(29명)에 이어 셋째로 많았다.


그는 여순반란 사건이 발생하자 대책위원장을 맡았고,

국회 국방위원장으로 국민개병(皆兵) 정신에 입각한 병역법을 발의했다.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 이범석(1900~1972)은 광복군 참모장 출신으로

광복 후 광복군 출신 청년들과 민족청년단(족청)을 만들어 대한민국에 청년 간부를 공급했다.

1946년 6월 광복군 500여 명과 함께 미군 병선을 타고 귀국한 그는 그해 10월

'민족지상(至上), 국가지상'을 내걸고 미 군정과 민족진영 지도자들의 후원 아래 족청을 출범시켰다.


족청은 창단선언문에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우리는 먼저 청년의 정신을 작흥시키고 청년의 진로를 명백히 하여

건국성업(建國聖業)에 역군이 될 것을 제기하려 한다"고 밝혔다.


족청은 대한민국정부 수립까지 중앙과 지방에서 9만명에 가까운 청년을 교육시켰고

100만명에 이르는 단원을 확보했다.

그리고 제헌의원 선거에 참여해 6명을 당선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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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독립운동가 이범석 장군 선정


군무부장 김원봉·성주식·손두환… 北으로 간 좌파 인사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할 무렵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중에는 좌파 사회주의 계열 인사도 있었다.

이 가운데 일부는 광복 후 정부 수립을 놓고 남북, 좌우가 극심한 대립을 보이자 북한을 선택했다.

북한 정권에 참여한 임정 요인 중 대표적 인물은 군무부장 김원봉(1898~1958)이다.

10대 후반 중국에 건너간 그는 1919년 12월 의열단 조직을 주도하고 단장으로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이끌었다. 이후 사회주의자가 된 그는 1925년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했고

1938년 좌파 항일 군사 조직인 조선의용대를 만들어 대장이 됐다.

1942년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이끌고 임정에 가담한 그는 광복군 부사령관과 제1지대장을 맡았으며

1944년에는 임정 군무부장에 선임됐다.


1945년 12월 임정 요인 2차 환국단으로 귀국한 김원봉

좌파 연합 정치 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공동 의장단으로 활동했고 1946년 6월 인민공화당을 만들었다.


그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가 북한에 남았다.

1948년 9월 북한 정권이 출범할 때 국가검열상이 된 그는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했지만

1958년 김일성이 정적(政敵) 연안파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함께 숙청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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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 생일날에 일장기를 처박고 보통학교를 자퇴한 13세 소년


1940년대 3黨 통합·광복군 창설… 새 국가의 그림 그리다


"국토와 주권을 완전 광복하여 대한민국을 건립할 것"(1940년 5월 '통합 한국독립당 강령').

"임시정부는 혁명적 삼균(三均)제도로서 복국(復國)과 건국(建國)을 통하여 일관한 최고 공리인

정치·경제·교육의 균등과 독립·민주·균치(均治)의 삼종(三種) 방식을 동시에 실시할 것임"

(1941년 11월 '대한민국 건국 강령').

1942년 4월 재편된 한국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
조선의용대의 일부 병력이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면서
기존 제1·2·5지대를 통합해서 만들었다.
제2지대는 편성 직후 중국 각지에 대원을 파견해 한국 청년을 모집하는 활동을 벌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이후 일본 제국주의 탄압을 피해 상해를 떠나 중국 각지로 옮겨다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0년 9월 중화민국의 전시(戰時) 수도 중경에 정착할 무렵부터

체제와 진용을 정비하고 독립과 건국을 향한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임정을 이끌어온 우파 민족주의 세력을 하나로 묶어 기반을 튼튼히 하는 작업이다.


중국 각지 옮겨 다니다 중경 정착
우파 3당 통합 '한국독립당' 창설


당시 중국에 있던 민족주의자들

김구가 이끄는 한국국민당, 조소앙·홍진이 주도하는 한국독립당(재건),

지청천·최동오 등 만주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이 중심이 된 조선혁명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1939년부터 협상을 벌인 3당은 임정이 중경으로 옮기기 직전인 1940년 5월

통합 한국독립당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신당(新黨)은 보다 큰 권위와 보다 많은 인원, 보다 광대한 성세(聲勢), 보다 고급적 지위를 가지고

우리 독립운동을 보다 유력하게 추진케 할 것을 확실히 믿고 바란다."('3당 해체 선언')


새로운 독립운동가들의 참여로 임시 의정원 의원은 17명에서 35명으로 늘어났고,

행정부인 국무위원과 각 부서도 확대 개편됐다.


임정이 이어서 한 일은 군사 활동을 담당하는 광복군 창설이다.

만주의 독립군 지휘관이었던 지청천·유동열·이범석·김학규에게 병력 모집 등 실무를 맡겼고,

미주(美洲) 동포들에게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또 중국 정부와 광복군 창설에 대한 인준과 원조를 교섭해서 승인을 얻어냈다.


임정이 중경으로 이전한 직후인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이 정식 발족했다.

신설 광복군은 총사령부와 3개 지대로 편성됐다.

임정 주석 겸 한국광복군창설위원장 김구는 '한국광복군선언문'을 발표했다.


"일본이 우리 조국을 병합 통치하는 동안 우리 민족의 확고한 독립정신은

불명예스러운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무자비한 압박자에 대한 영웅적 항쟁을 계속하여 왔다. …

우리들은 한·중 연합 전선에서 우리 스스로의 계속 부단한 투쟁을 감행하여

극동 및 아세아 인민 중에서 자유·평등을 쟁취할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오늘의 역사] 1940년 9월 17일, 일제 강점기 '한국광복군' 창설
▶죽음에서 걸어 나온 '임시정부 수호신' 김구

임정이 중경에 정착한 뒤 좌·우 통합을 추진할 무렵인 1941년 3·1절 기념식을 마치고
자리를 함께한 독립운동가들. 왼쪽부터 김구·조소앙·신익희·김원봉.

광복군은 중국 각지에 흩어진 한국인 무장 세력을 흡수하는 작업에 나섰다.


먼저 무정부주의 청년들이 중심이 돼 1939년 11월 결성된 한국청년전지(戰地)공작대

1941년 1월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했다.

사회주의자들의 연합 조직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이 1938년 8월 만든 무장 조직 조선의용대의 일부는

1942년 7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됐다.

임정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대일선전(對日宣戰) 성명을 발표하고

연합군과 공동 작전에 들어갔다.

"한국의 전체 인민은 반(反)침략 전선에 참가해 오고 있으며,

이제 하나의 전투 단위로서 축심국(軸心國)에 대하여 전쟁을 선언한다. …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왜구를 완전히 구축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血戰)한다."


광복군중국군과 함께 활동했고, 일본과 전쟁을 벌이던 인도·버마 전선의 영국군에 공작 대원을 파견했다. 또 미군 OSS(전략첩보국)와 합작해 김준엽·장준하 등 광복군 대원을 훈련시켜 국내 진공 작전을 추진했다.


▶광복군, 미군과 함께 국내진입 합동작전 계획하다


광복군, 한인 무장 세력 흡수
김원봉 등 좌파 세력도 결집
1941년 '대한민국건국강령' 발표


임정의 다음 행보는 좌우 연합 정부 구성이었다.

1930년대 이후 중국에서 활동하던 좌파 사회주의 세력은 임정 밖에 있었다.

하지만 중경에 정착한 임정이 세력을 확대하자 이들도 임정으로 결집했다.


김성숙조선민족해방동맹은 1941년 12월1일, 김원봉조선민족혁명당은 12월 10일 임정에 합류했다. 임정은 1942년 8월 임시 의정원을 확대해 23명의 의원을 늘렸는데 이 중 상당수는 좌파 인사였다.

1944년 4월 헌법을 개정한 뒤 확대된 정부 조직에도

김규식(부주석), 김원봉(군무부장), 성주식·장건상·김성숙·유림(국무위원) 등 좌파 단체 인사가 참여했다.


정치·군사 역량을 강화한 임정은 독립과 건국 구상을 밝혔다.

1941년 11월 발표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이 그것이다.


임정의 최고 이론가 조소앙이 기초한 이 강령은

광복 후 건설할 민족국가상(像)인 동시에 임정의 지도 이념이었다.


건국 강령총강(總綱)·복국(復國)·건국 3개 장으로 돼 있다.


총강은 우리 민족의 과거에서 미래에 이르는 정신적 토대와 이념을 담고 있다.

복국은 독립운동의 단계별 임무와 방법을 제시했다.

건국은 광복 후 건설할 국가의 성격을 비롯해 정치·경제·교육의 원칙과 정책을 상세히 설명했다.


건국 강령을 만들 무렵 임정 요인들의 부푼 열정은 1942년 3·1절 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臨政 헌법·강령 계승한 대한민국 제헌 헌법

과도 정권 수립 무산… 남북협상 실패하자 單政 참여로


일제가 패망한 얼마 뒤인 1945년 9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외 동포에게 고(告)함'이란 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가 처한 현 단계는 건국강령에 명시한 바와 같이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려 하는 과도적 단계이다.…

본 임시정부는 최속(最速) 기간 내에 곧 입국할 것.

전국적 보선(普選)에 의한 정식 정권이 수립되기까지의 국내 과도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저명한 각 민주 영수회의를 소집하도록 적극 노력할 것."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11월 5일 임정 요인들은 꿈에 그리던 환국 길에 올라 상해에 도착했다.

중경을 떠나기 전날 이들은 앞으로의 포부를 실은 기념 휘호를 한데 담았다.

그중에는 '건국(建國)'이 들어 있는 것이 많았다.


법무부장 최동오는 '화평건국(和平建國)'을 기원했다.

문화부장 김상덕은 '단결건국(團結建國)'을 다짐했다.

국무위원 황학수는 '건국필성(建國必成)'을 기약했다.


▶김구·김원봉 함께한 사진… 임정 요인이 쓴 '建國必成'

1진과 2진으로 나누어 환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1945년 12월 6일 서울 경교장에 모였다.
앞줄 왼쪽부터 장건상·조완구·이시영·김구·김규식·조소앙·신익희·조성환.
뒷줄 왼쪽부터 유진동·황학수·성주식·김성숙·김상덕·유림·조경한·김붕준·유동열·김원봉·최동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조국의 상황은 장밋빛 희망과는 달랐다.

한반도 38도선 이남에 군정(軍政)을 펴고 있던 미국임정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임정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임정 요인들은 미군이 보내온 비행기를 타고 두 차례로 나누어 11월 23일과 12월 2일 서울에 도착했다.


서대문 근처 경교장에 자리잡은 임정은 약속했던 대로 과도정권 수립 활동에 들어갔다.

김구 주석이 국내의 정치지도자를 만났고, 내무부장 신익희는 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위원회를 운영했다.

그 결과로 1946년 2월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비상국민회의가 정당·단체 대표가 참여한 가운데 발족했다.


하지만 비상국민회의를 기반으로 과도정권을 수립하려는 계획은

이 조직이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으로 변질되면서 좌절됐다.


임정의 건국 구상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외상회의'한반도 신탁통치'를 결정하면서

큰 장벽에 부딪혔다.

1943년 초 전후(戰後) 한반도의 국제 공동관리가 처음 제기됐을 때부터 강력 반대하며

'즉시 독립'을 주장했던 임정은 곧바로 '4국 원수(元首)에게 보내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대대적인 반탁 운동에 들어갔다.


美軍政과 마찰로 개인자격 귀국, 대대적 신탁통치 반대운동 벌여


"우리는 모스크바 회의에서 신탁통치제를 적용한다는 결의에 반대한다.

민족 자결의 원칙을 고수하는 한국 민족의 총의에 절대로 위반된다.

2차 세계대전 중 누차 선언한 숙약(宿約)에 위반된다.

한국에 탁치를 실시함은 극동의 안정과 평화를 파괴할 것이다."


1946년 내내 신탁통치와 미·소 공동위원회 문제로 정국이 교착 국면에 빠지자

임정은 그해 말부터 다시 대규모 반탁운동을 벌이는 한편

비상국민회의국민의회로 확대·강화해 과도정권을 수립하려고 했다.

하지만 미군정이 이를 저지하고 주석으로 추대된 이승만이 취임을 거부하는 바람에

임정의 과도정권 수립 추진은 또다시 실패했다.


1947년 하반기 들어 2차 미·소 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면서

임정의 건국 구상은 결정적인 고비를 맞았다.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우선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동조하는 우파 세력은 한국민족대표자회의를 결성했다.

임정 요인 중에서도 호응하는 인사들이 나왔다.


7월 신익희한국독립당을 탈당하고 민족대표자회의에 합류했다.

9월 국민의회가 단정(單政) 반대 결의문을 채택하자 이시영이 임정 국무위원을 사퇴했다.

1940년 이후 머물렀던 중경을 떠나기 직전 임정 요인들이 환국을 기념하며 함께 남긴 휘호.

임정남북대표회의를 조직하고 미·소 양군(兩軍)을 철수시킨 뒤 남북한 통일선거를 실시하여

중앙정부를 구성하는 방안을 채택했다.

그리고 우파와 중도파 정치세력을 망라한 협의회를 만들고 남북 요인(要人) 회담을 제의했다.


1948년 1월 서울에 도착한 유엔 한국위원단의 입북(入北)을 북한소련이 거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가시화되는 가운데, 4월 평양에서 남북협상이 전개됐다.


여기서 채택한 공동성명서

'외국 군대의 즉시 철거,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통일적 입법기관을 선거하여 통일적 민주정부 수립, 남조선 단독선거 결과 불인정'을 표명했다.


"단독정부 수립 불가피" 주장에 臨政 신익희·이시영 등도 호응
조소앙 "대한민국 거부 이유 없어"


그러나 남북협상에 참가한 임정 요인 가운데 그 결과에 실망하고

남한 단독정부의 불가피성을 인정한 인사도 상당수였다.

대표적 인물이 외무부장 조소앙이었다.


그는 서울로 돌아온 뒤 남한 정부 수립을 지지했고,

1948년 10월 발표한 성명서에서

"목전 서울에 있는 대한민국은 그 전신이 피두루마기를 입은 3·1운동의 골격이며

5천년의 독립 민족의 적자이며 장래 통일정권에로 돌진하는 발동기가 되고 가교가 되고

민족진영의 최고 조직체임을 이에 천명한다.…

자신이 참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당의 정책이 집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권과 영토가 완성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을 거부할 이유가 발견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주도했던 임정 부주석 김규식

1948년 12월 유엔 총회가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자 이를 반기며

"나는 본래부터 대한민국 정부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제까지 불합작하였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1949년 7월 신익희·안재홍·원세훈 등 야당 정치인들이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고 그 발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공산진영은 배제하고 전향을 촉(促)한다'는 강령을 내걸고

민족진영강화위원회를 만들었을 때 김규식이 의장을 맡았다.

오랜 세월 낯선 땅에서 풍찬노숙하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한 독립운동가들의 꿈은

광복 후 시련과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실현됐다.


▶'臨政의 법통 계승' 헌법 전문에 기록
▶감격인지 슬픔인지 가늠하기 힘든 남한 단독정부 수립

도심 뒷골목·허름한 건물, 애국자들의 본거지가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수립… 독립운동 최고 중추 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