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1948년 대한민국 출범] [1] 5·10 총선, 민주주의 첫발
- 한반도 최초의 자유민주선거
여성 선거권 스위스보다 앞서… 선거 전일·당일엔 술 판매 중지
- 北은 '흑백 투표함' 공개 선거
유엔위원단 入北 거부한 채 강행, 인민공화국 수립 일방적 선포
- 국제사회 승인 결정적 명분
유엔 "한민족 다수의 민의… 대한민국이 유일한 합법 정부"
올해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70주년이다.
5·10 총선부터 제헌국회 개원(5·31), 헌법 제정(7·17), 정부 수립(8·15), 유엔 승인(12·12)까지
숨 가쁘게 진행된 대한민국의 공식 출범 과정을 한국정치외교사학회와 함께 연중 특별기획으로 재조명한다. 시야를 넓혀 한반도 전체와 세계적 관점에서 최신 연구 성과를 담아낸다.
'유권자의 날'이었던 지난 10일은 70년 전 대한민국의 제헌(制憲) 국회의원들이 선출된 날이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이 감독한 총선의 선거일은
원래 5월 9일로 정해졌으나 일식(日蝕) 예보와 일요일 선거 반대 여론으로 하루가 늦춰졌다.
38선 이북에서 '최초의 민주 선거'라고 주장한 1946년 11월 3일의 선거는 일요일에 강행됐다.
이 선거는 소련군 사령부와 기독교계를 가른 큰 분기점이었고,
이북 기독교계가 주도한 주일 선거 불참 운동은 '최초의 단독선거'에 대한 불참 운동이 되었다.
1946년 11월 3일 북한 지역의 선거는 흑백 투표함을 사용한 사실상의 공개투표이자, 강제투표였다.
그것은 러시아에서 1917년 케렌스키 사회민주정권을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았던 공산주의자들이 고안해낸 인민민주주의에 근거했다.
여기서 민주주의란 '다수의 인민이 충분히 계급의식이 고양되기 전이라도
유일 선도 정당의 독재적 방식으로 인민의 잠재적 이익을 실현하는 것'을 의미했다.
451만 6120명의 유권자가 등록했고 그중 99.68%가 투표에 참가해 후보자에 대한 찬성률 97%를 기록했다.
이 선거에 따라 1947년 2월 '임시' 자(字)를 뗀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수립됐다.
이러한 소련식 민주주의는 해방군을 자처한 소련군에 의해 뒷받침됐다.
스탈린은 "모든 세력은 자국의 군사력이 미칠 수 있는 한 어디나 자신의 체제를 이식하려고 한다"고 했다.
스탈린은 소련군의 만행에 대해서도
"그런 지옥(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나와서 여자에게 조금 몹쓸 짓을 했기로서니 뭐가 그리 대수란 말이냐?
우리는 감옥을 열어서 모조리 군대로 보냈다"라고 옹호했다.
1948년 4월 중순까지 38선 이남의 유권자 877만여명 중 약 805만명인 91.8%가 등록을 마쳤다.
38선 이북을 장악하고 있던 북조선로동당과 38선 이남의 남조선로동당은
1948년 8월 25일 38선 이북에서 흑백 투표함을 사용한 공개적 찬반 투표를 통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212명이 확정됐다.
1946년에 이어 다시 인민민주선거가 실시된 것이다.
김달삼을 포함해 이남 지역 대의원 360명도 추려졌다.
평양 정권은 38선 이북의 유권자 99.99%가 투표했고, 이남에서도 비밀리에 77.5%가 참가했다고 선전했다.
이를 근거로 서울을 수도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됐다.
1948년 12월 12일 프랑스 파리의 샤요궁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총회는
장면이 이끄는 대한민국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에서 주민의 '자유의지(free will)'가 표현된 유일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유엔이 인정할 수 없는 선거를 치렀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는 참석할 수 없었다.
1919년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지 못한 결정적 이유는
주민들의 의사가 선거를 통해 확인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광복 후 많은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자유민주선거인 5·10 총선을 통해
한반도 주민 다수의 자유의지가 확인됨으로써 국제사회가 대한민국의 독립을 인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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