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대한민국 출범]

2[2] 王政·일제·미군정에 마침표 찍고… 백성이 국민 되다 (김용직 교수, 조선일보)

colorprom 2018. 5. 23. 16:28

2王政·일제·미군정에 마침표 찍고… 백성이 국민 되다


조선일보
                             
  • 김용직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입력 2018.05.23 03:01

    [다시 보는 1948년 대한민국 출범] [2] 5·10총선, 국민이 주권자로

    경쟁률 4.7대1… 무소속 85명 당선
    이승만·한민당·소장파 3각 구도… 김구의 한독당 계열도 상당수
    유엔 "서방세계의 선거 모델" 찬사

    김용직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용직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나는 늙은 사람들이나 남자나 여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용감한 젊은 어머니들이 어린아이를 등에 업거나 데리고 투표장에 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비밀투표에 의하여 그들의 장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대표자를 선출하고자 나갔다."(1948년 5월 13일 자 조선일보)

    일제 패망 후 남한을 3년간 통치한 미군정의 최고 지도자 하지 사령관은 자진해 투표장에 나오는 전국 남녀노소 주민들의 모습에 감동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5·10 총선이 한국 유권자들의 용감한 행동을 통해 이룩된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총선에 관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최종 보고서는 "대부분 선거는 평온하고 질서 있는 가운데 치러졌고 가히 서방세계의 모델이 될 만한 것이었다"고 찬사를 보내고 "(선거를 저지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은 실패하였다"고 선언했다.

    5·10 총선의 당선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당선자의 평균 연령은 47.1세였다. 최연소자는 27세인 경북 봉화의 배중혁이었고, 최고령자는 73세인 서울 동대문갑의 이승만이었다. 전국 최다 득표자는 4만1532표를 얻은 서울 성동의 지청천. 경력은 공무원 21.5%, 교원 11%, 신문인 11%, 청년운동 8%, 종교인 5.5%, 독립운동 4.5% 순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 민주 선거였던 5·10 총선의 평균 경쟁률은 4.7대1. 의석수 200개를 놓고 전국에서 입후보자 948명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정당·단체 48개가 경쟁했는데 당선자를 낸 곳은 16개다. 1948년 1월 중순 소련이 북한 지역의 선거 실시를 거부했고 남한에서도 좌익계가 선거를 거부했다. 김구와 김규식이 4월 하순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석하면서 한국독립당과 일부 중도파도 선거 불참을 결정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손으로 세우는 첫 근대국가의 국정에 참여하려는 열기는 뜨거웠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헌국회 의원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투표하는 모습.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헌국회 의원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투표하는 모습. 기표소마다 후보자의 사진과 이름, 작대기로 표시된 기호가 실린 선거 벽보가 붙어 있다. 이 선거로 전국에서 198명이 당선됐고 선거가 실시되지 못한 제주도 북제주군의 2명은 이듬해 5월 선출됐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정당별 전국 개표 결과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명, 한국민주당 29명, 대동청년단 12명, 조선민족청년단 6명, 기타 군소정당 13명, 그리고 무소속 85명이었다. 독촉국민회는 1946년 2월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위해 이승만과 김구가 손잡고 만들었지만 5·10 총선이 추진되면서 김구 세력은 떨어져 나가고 이승만을 지지하는 정치조직이 됐다. 한국민주당은 1945년 9월 국내에 있던 우파 민족주의 인사들이 만든 정당으로, 미군정에 적극 참여했으며 이승만과 손잡고 총선거 추진에 앞장섰다. 대동청년단은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이 1947년 9월 청년단체들을 통합해 만들었고 본격 출범을 준비하는 국군에 초급 지휘관을 공급했다. 조선민족청년단은 광복군 총참모장 출신인 이범석이 1946년 10월 미군정의 후원 아래 조직했고 당시 '단원 100만명'을 내세웠다. 무소속이 많이 당선된 것은 5·10 총선이 정당·단체 못지않게 인물 위주의 투표 선택이 두드러졌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당선자의 실제 구성은 공식 투표 결과와는 달랐다. 미군정의 G-2보고서는 실질적인 의회 세력은 한국민주당이 76석, 독촉국민회가 61석, 한국독립당이 17석을 차지했다고 분석했다. 이는 당선을 위해 무소속으로 위장 출마한 한민당계가 많았고, 당명을 어기고 출마한 한독당계 인사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선자 중에서 경기도 옹진의 오택관, 전라북도 전주의 신성균 등이 한독당 계열이었다.

    결국 제헌국회는 5·10 총선에 참여한 우파의 양대 정치 세력인 이승만계와 한민당계 어느 쪽도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는 5·10 총선 결과가 어느 한 정치 세력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님을 말해준다. 또한 보수 일색이라기보다 중도·진보적인 '제3세력'의 소장파도 50여 명에 달했다. 민심의 선택이 독촉국민회, 한민당, 무소속 소장파의 3각 구도를 성립시킨 것이다. 곧 문을 여는 제헌국회는 이들 세력의 이합집산 여부에 따라서 복잡한 정국 운영과 불확실성이 잠복해 있었다.

    5·10 총선은 한국인이 자유로운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공화 민족주의 혁명이 최종 완성된 민족자결주의적 대사건이었다. 36년의 일제 시기와 3년간의 미군정 시기를 마감하는 한국 민족주의 혁명의 대미(大尾)였고, 90%가 넘는 투표율을 통해 오랜 세월 왕정(王政)의 백성이었던 한민족이 공화정의 국 민으로 재탄생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정치사적으로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과 김구 등이 주축이 돼 독립의 대장정 30년 세월을 이끌어온 저항 민족주의 운동이 마무리됐다는 의미를 지닌다. 1948년 5·10 총선이라는 집단적 경험을 통해 마침내 근대 공화정 국가의 주체인 대한국민이 실질적 주권자로 탄생한 것이다.


    공동기획: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23/2018052300017.html





    한민당 주요 간부들 낙선, 좌파 경력 조봉암·김약수 당선


    조선일보
                                 
               
    입력 2018.05.23 03:01

    [다시 보는 1948년 대한민국 출범]

    5·10 총선 당선자 중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대표적인 인물은 이승만과 신익희였다. 총선거 실시를 주도한 이승만은 독촉국민회뿐 아니라 정파를 초월한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출신인 신익희는 1945년 12월 환국 후 임정 요인 중 반공(反共) 단정(單政) 노선을 가장 명확히 했다. 국제 정세에 밝았던 그는 미·소(美·蘇)의 역학 관계나 남북한의 이념 대립을 고려할 때 당장은 통일 정부 수립이 어렵다고 봤다. 경기도 광주에서 무투표 당선된 신익희는 제헌국회 소집을 위한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개원 작업을 이끌었다.


    (왼쪽부터)지청천, 김도연, 김약수, 조봉암
    (왼쪽부터)지청천, 김도연, 김약수, 조봉암


    한국민주당은 전체 의석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했지만 당수(黨首)인 김성수는 5·10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고 백남훈·윤보선·서민호 등 주요 간부들은 낙선했다. 한민당 출신으로 5·10 총선에서 당선된 유력 인사는 김도연·김준연·김동원·서상일 등이다. 김도연(서울 서대문)은 도쿄 유학 시절인 1919년 2·8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일제 말기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김준연(전남 영암)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동아일보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돼 7년간 투옥됐다. 김동원(서울 용산)은 평안도 출신의 실업인으로 흥사단 핵심 인물이었고, 서상일(경북 대구시을)은 일제 강점기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양대 세력을 견제하는 제3세력 당선자 가운데 주요 인물은 조봉암(경기도 인천시을)과 김약수(경상남도 동래)였다. 조봉암은 1차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하는 등 사회주의 항일 운동을 했는데 광복 후 박헌영의 공산주의 노선을 공개 비판하고 전향했다. 이후 미 군정의 좌우 합작 노선에 협력했고, 5·10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김약수는 일제 강점기 국내에서 사회주의·노동 운동에 투신해 총 9년7개월 동안 복역했다. 광복 후엔 좌익 노선을 버리고 한국민주당에 참여했다가 다시 탈당해서 김규식과 손잡고 중간파 노선을 걸었다. 1947년 5월 조선공화당을 창당한 뒤 5·10 총선에 출마했다.


    공동기획: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23/201805230001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