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대한민국 출범]

2[3]198표 중 188표로 의장 된 이승만 "국회는 3·1 국민대회 계승" (심지연 교수, 이선민 기자, 조선일보)

colorprom 2018. 6. 1. 16:11

2198표 중 188표로 의장 된 이승만 "국회는 3·1 국민대회 계승"


조선일보
                             
  • 심지연 경남대 정외과 명예교수
    •           
    입력 2018.06.01 03:00

    [다시 보는 1948년 대한민국 출범] [3] 제헌국회, 문을 열다

    심지연 경남대 정외과 명예교수
    심지연 경남대 정외과 명예교수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의사당으로 사용된 서울 광화문 중앙청 회의실에는 오전 9시부터 의원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최고령 이승만을 비롯한 4~5명은 한복, 3분의 1은 모닝 코트, 나머지 의원은 양복을 입었다. 2층 방청석에는 독립운동가 오세창과 이시영을 비롯한 각 사회단체 대표와 국내외 신문기자들이 자리 잡았다.

    5·10 총선 직후 국회선거위원회와 미 군정 사이에 국회 소집 문제를 놓고 토의가 있었다. 제헌국회 소집 권한은 미군사령관이 갖고 있지만 한국인의 손으로 소집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따라 22일 당선자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1차 준비위원회가 열렸고, 신익희를 준비위원장으로 선출했다. 하지 사령관은 선거위원회에 국회 소집 권한을 부여하고 임시의장으로 최고령자를 지명하는 내용을 담은 포고를 25일 발표했다. 선거위원회는 제헌국회의 첫 회의를 5월 31일 오전 10시에 갖는다고 공고했다.

    제헌국회 개원일 오전 회의에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국회 제1차 회의를 열게 된 것이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이므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 감리교 목사인 이윤영 의원에게 기도를 올리도록 했다. 이윤영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라고 기도 드렸다.

    감사 기도가 끝난 뒤 정·부의장 선거가 있었다. 의장에는 198표 중 188표를 얻은 이승만이 압도적인 다수로 당선됐다. 부의장은 제헌국회의 양대 세력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한민당의 물밑 다툼이 치열했다. 1차 투표에서 신익희 76표, 김동원 69표, 지청천 39표, 이윤영 11표, 김약수 5표였고 최고 득점자 2명을 놓고 결선투표를 한 결과 신익희 116표, 김동원 81표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신익희가 부의장에 선출됐다. 이어 실시된 선거에서는 김동원 77표, 지청천 73표, 이윤영 38표, 김약수 6표였고 결선투표 결과 101표를 얻은 한국민주당 김동원이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연설하고 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연설하고 있다. 단상에 정·부의장석이 마련됐고, 단하에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 및 미 군정과 과도정부 간부들의 자리를 배치했다. /조선일보DB
    개원을 전후해 각 정파는 주도권 장악을 위해 무소속 포섭 공작을 맹렬히 전개했다. 무소속은 존재감 과시와 행동 통일을 노려 '구락부' 결성에 나섰다. '클럽'의 일본식 발음인 구락부는 교섭단체처럼 활동하는 것으로 '3·1구락부' '6·1구락부' 등이 있었다. 이 중 세간의 이목을 끈 것은 6월 1일 의원 50여명이 만든 '6·1구락부'였다. 조선공산당 창립 멤버였던 조봉암과 김약수가 결성을 주도했고 중간노선 견지를 표방했기 때문이다.

    점심 식사 후 오후 2시 시작된 개원식서 제헌국회 의원들은 '헌법을 제정하고 남북통일의 대업을 완성한다'는 선서를 했다. 개원식에서 이승만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13도 대표들이 모여 국민대회를 열고 임시정부를 건설했는데, 국회는 이 국민대회의 계승이며 국회가 건설하는 정부는 서울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를 계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의장 선출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과거의 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한 정부 수립에 포섭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김구는 "당분간 이승만과의 합작은 불가능하다"고 응수했다.

    제헌국회 개원식이 거행되는 날 서울 시내는 집집마다 태극기를 달았으며 세종로와 태평로를 가득 메운 공무원과 시민·청년·학생이 손에 국기를 들고 국회 개원을 축하했다. 식이 끝난 후 차를 탄 이승만 의장 부부가 세종로에서 남대문까지 군중의 만세와 박수를 받으며 지나갔고, 각 단체의 악대를 선두로 한 행렬이 뒤를 따랐다. 이날을 경축하기 위해 시내 곳곳에 기념탑이 세워졌고 연도에는 태극기가 게양됐으며 종로 거리는 꽃 전차가 누비고 다녔다.

    경축 분위기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북한의 비난은 예상된 것이었지만 단정분쇄공동투쟁위원회라는 단체의 선전·선동에 따라 서울 시내 여러 곳에 국회 소집을 반대하는 삐라가 살포됐고 용의자들이 체포됐다.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은 불상사를 방지하고 치안의 만전을 기하기 위 해서라며 서울 시내에 비상경계령을 발동하고, 폭동을 일으키는 자에겐 즉시 실탄 발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헌국회가 무사히 개원식을 거행함으로써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라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사업을 완결지었다. 분단이라는 아쉬운 상황 속에서나마 3000만 한민족의 숙원인 자주독립의 길은 그 본격적인 첫걸음을 내디뎠다.


    공동기획: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6/01/2018060100016.html




    이윤영·한경직… 5·10 총선 성공 도운 西北 지도자들


    조선일보
                                 
               
    입력 2018.06.01 03:00 

    [다시 보는 1948년 대한민국 출범] [3] 제헌국회, 문을 열다


    (왼쪽부터)조만식, 이윤영, 한근조, 한경직
    (왼쪽부터)조만식, 이윤영, 한근조, 한경직


    5·10 총선이 성공적으로 실시된 데는 북한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도움이 됐다. 광복 후 소련군을 등에 업고 북한 전역을 장악해가는 공산당 세력에 저항하다 월남한 서북인들은 조선민주당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도왔다.

    1945년 11월 조만식을 당수(黨首)로 평양에서 결성된 조선민주당은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문제가 제기되자 거센 반탁 운동을 벌였다. 조만식이 소련군 당국의 찬탁 번복 요청을 거절한 뒤 연금 상태에 놓이고 최용건 등 공산당이 당 조직을 장악하자 조선민주당 간부들은 월남을 결심했다. 작별 인사차 찾아온 부당수 이윤영에게 조만식은 "남쪽에 가면 이승만 박사와 굳게 손을 잡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1946년 4월 이윤영·한근조 등을 중심으로 서울에 재건된 조선민주당은 민족통일총본부,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등 이승만을 지지하는 정치 조직에 적극 가담했다.

    1948년 들어 소련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入北)을 거부하자 월남한 북한 사람들은 서북 특별선거구를 만들어줄 것을 요구했다. 제헌국회 의석 300석 가운데 100석이 북한 몫이었는데 그중 45석을 월남한 사람들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3월 20일 서울 남산공원에서 이윤영·김병연·한경직 등 월남한 서북인 지도자들과 이승만이 참석한 가운데 특별선거구 도입을 촉구하는 '재남(在南) 이북인 대회'가 열렸다. 독립촉성국민회와 한민당도 지지했지만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선민주당이 총선 거부 움직임을 보이자 이승만과 한민당 당수 김성수가 상의해 이윤영에게 김성수가 출마할 예정이던 서울 종로갑 선거구를 양보했다. 5·10 총선에는 5명의 조선민주당 후보가 출마했지만 이윤영만 당선됐다. 


    공동기획: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6/01/201806010002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