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4[최인훈] 역사가 된 최인훈 (조선일보)

colorprom 2018. 7. 27. 15:56


    

5[일사일언] 사랑과 시간


조선일보
                             
  • 조덕현 미술가·이화여대 교수
    •          
    입력 2018.07.27 03:01

    조덕현 미술가·이화여대 교수
    조덕현 미술가·이화여대 교수



    여기도 벽, 저기도 벽, 갇힌 세대라는 피해 의식이 엄습하던 저 70~80년대에

    최인훈 선생의 글을 읽고 금과옥조로 삼은 적이 있다.


    소설 '회색인'의 경우엔 내용 중 분단 문제뿐만 아니라 미술을 전공하던 내게 제기되던

    전통의 문제, 서양 콤플렉스, 현실 참여 문제 등등 다양한 문제의식과 물음이 포함되어

    거듭 읽으며 이해하려 했다.


    그중에서도 혁명을 종용하는 친구에게 주인공이 대안으로 제시한 '사랑과 시간'이라는 문학적 표현에

    깊이 감응하였는데 그때가 정치적으로 거친 현실과 예술적 수행 사이에서 갈등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사랑이 어떻게 표류했는지, 속절없이 시간은 흐르고 세상도 많이 달라졌다.

    엊그제 선생의 부음을 들으니 이렇게 분단 세대가 퇴장하는구나 싶고,

    동시에 잊고 있던 그 시절 물음들이 떠올랐다.

    그동안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 물음들 중에는 이미 시효가 지난 것들도 있지만 여전히 유효한 것들도 있다.

    예컨대

    "우리는 서양 친구들이 밀어놓은 바윗돌을 밀어 올리는 작업에 동원된 일꾼 같은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나마 바위에 손을 대는 것도 허용되지 않고 시시포스의 엉덩이를 밀고 있을 뿐"이란 대목에선 '글로벌'이라는 미명하에 가치 판단마저도 서구에 위임하고

    사사건건 그들의 인장을 받기 위해 애쓰는 우리 예술계의 풍토가 얼핏 스친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최인훈 선생 세대엔 펄펄 살아서 피가 뚝뚝 떨어지던 분단 문제

    어느덧 그 절실함이 희석되어 다음 세대로 대물림되고,

    우리의 고뇌론 어찌할 수 없이 갈등이 극대화되어 이제 파국을 맞는 건가 절망했던 것이

    불과 8개월 전까지의 사실이다.

    그러던 것이 느닷없이 일이 풀리며 그토록 염원하던 북한의 개방이라는 엄청난 일이 저만큼 다가오는 듯하다.


    제발 희망고문이 아니길 바란다.

    분단의 극복은 단절된 전통과 상상력의 복원을 야기하고,

    그에 따라 서양 콤플렉스를 넘어서서 새로운 담론 생성으로 이어지는 희망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랑과 시간이 필요한 시점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27/2018072700143.html


    4[박해현의 문학산책] "나를 三流 정치 평론가로 보는 사람도 있다"


    조선일보
                                 
               
    입력 2018.07.26 03:12


    작고한 소설가 최인훈 '文學답지 않다'는 비판에도 정치·역사 등 거대 담론 끌어들여

    '현대 한국의 사상가' 평가받아

    말년엔 유전공학에도 관심 쏟아… 후배들에게도 '발상의 전환' 강조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지난 23일 타계한 소설가 최인훈을 마지막으로 취재한 것은
    3년 전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작가의 자택에서였다.
    최인훈 문학을 연구해 온 독일인 바버라 월 교수(덴마크 코펜하겐대학)가
    유럽에서 열릴 한국학회에서 상영하기 위해 최인훈과의 대담을 녹화하는 자리였다.

    최인훈은 지난 2001년 서울예술대학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한 뒤 신작 발표와 대외 활동을 삼간 채
    칩거 중이었다.

    최인훈은 이날 드라큘라 이야기를 꺼내 대화를 풀어갔다.

    "얼마 전에 영화 '드라큘라' 주연을 맡았던 크리스토퍼 리가 세상을 떴다.
    나는 드라큘라 영화를 좋아했다.
    많은 한국 작가가 샤머니즘에서 영감을 얻었듯이, 나는 드라큘라에게서 많은 것을 느꼈다.
    내 소설 '구운몽'은 관 속에 누워 있던 사람이 깨어나
    마치 드라큘라의 성(城) 속을 돌아다니듯이 도시를 배회하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던 중 고개를 갸우뚱거려야 했다. 최인훈과 드라큘라가 쉽사리 연결되지 않았다.
    나중에 최인훈의 소설 '회색인'을 뒤졌더니, 드라큘라를 짧게 풀이한 대목이 나왔다.
    젊은 날의 최인훈이 보기에
    '드라큘라는 기독교의 신(神)에 반발해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한 인간이었고,
    지배 권력에 저항하는 지하운동가를 상징했다'는 것이다.
    최인훈이 그 또래의 한국 작가들과는 남다른 감수성을 지녔음을 일깨우는 대목이기도 하다.

    4·19 세대 문학평론가들에 따르면 최인훈의 등장은
    그 이전까지 한국 소설을 지배한 샤머니즘과 토속 정서를 탈피해
    세련된 지성의 언어로 쓴 소설의 시작을 알렸다고 한다.

    최인훈은 1994년 출간한 자전 소설 '화두'를 읽기 시작했다는 독일인 교수에게
    "그 소설을 읽으면 내 생애와 작품 활동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철학자가 아님에도 철학적으로 생각했고,
    아마추어 역사학자이면서도 지난 100년 동안 한국 역사의 주요 문제를 되돌아봐야 했다.
    한국문학은 민족주의에 꽉 잡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소설가로만 살기 힘들었다.
    그래서 나를 삼류 정치평론가, 삼류 역사학자, 삼류 박물학자로 보는 사람도 있다."

    박해현의 문학산책
    /일러스트=이철원
    소설 '화두'를 두고 '이것도 과연 소설이냐'고 의문을 제기한 비판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20세기 한국사와 세계사의 주요 사건과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작가의 온갖 생각이 방목(放牧)되어 있다.
    전통적 의미의 소설이라고 하기엔 성찰록의 성격이 더 강했다.
    하지만 작가는 '삼류' 소리를 감내하면서 정치와 역사, 철학을 아우른 거대 담론을 소설에 끌어들였다.

    '화두'를 출간한 뒤 최인훈은 후배 작가 이문열과의 대담에서
    "그동안 한국 작가들은 지구의 현재에 대해서,
    또는 지구와 인류 등 큰 사이즈의 개념에 대해서 주눅이 들어 있었지만
    이제는 그 문제 앞에서 작아질 필요가 없다"고 했다.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볼 때 냉전의 종식이 표면적으로는 한쪽 손(자본주의)을 올려준 것처럼 보이지만,
    좀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종래의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참신하게 몸으로 발상하려는 순진무구한 내면의 개종(改宗)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작가는 "인간은 경험한 것만으로 살 수 없기 때문에 관념의 도움이 필요하다"라며
    "인간이 자신의 문제에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관념적으로 생각하게 된다"고 쓴 적도 있다.

    그래서 최인훈을 소설가에 국한하지 않고 현대 한국의 사상가로 꼽는 학자도 적지 않다.
    최인훈의 산문 중 정수(精髓)를 골라 모은 '바다의 편지-인류 문명에 대한 사색'이
    최인훈 사상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게 하는 책이다.

    돌이켜보면 최인훈등단 40주년을 맞은 해(1999년)에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화두' 출간 이후 또다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미발표 소설 몇 편이 있다고 했다.
    "20세기 가장 큰 사건은 DNA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설계도를 드러낸 DNA 이전과 이후의 철학과 예술은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다.
    유전공학과 생물학을 다룬 미발표 단편을 책상 서랍에 넣어뒀다."

    다시 2015년 자택에서 이뤄진 마지막 취재를 회상해보니, 그때까지도 그 단편들은 발표되지 않았다.
    헤어지기 전에 최인훈
    "작가는 누구나 머릿속에 쓸 거리를 가득 담고 있다. 문제는 그걸 언제 쓰느냐"라는 우스개를 던졌다.

    그 이후에도 작가의 신작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서랍 속의 미발표 원고 역시 작가의 농담이었던가.
    하지만 평소 깐깐했던 성품의 작가가 그런 허언(虛言)을 지어낼 재주를 지녔다고 보긴 어렵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25/2018072503781.html


    3[만물상] 역사가 된 최인훈


    조선일보
                                 
               
    입력 2018.07.24 03:16

    오래전, 퇴임을 두어 달 앞둔 최인훈 서울예대 교수를 찾아갔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던 그를 2층 복도에서 마주쳤다.
    그는 쏟아져 들어온 봄 햇살을 발로 툭툭 차듯 걸었다. 가볍고 여유로웠다.
    어깨까지 내려오던 회색 머리칼이 생각난다.
    그가 권했던 녹차와 케이크의 달콤함이 혀끝에 아련하다.
    그는 고별 강연에서 "예술이란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돌격 5분 전에 휴식을 취하며 부르는 노래"라고 했다.

    4·19가 있던 해 가을 세상은 한 치 앞이 어지러웠다.
    서울대 법대 자퇴생 스물다섯 최인훈은 600장 분량 '광장' 원고를 한 월간지에 넘겼다.
    원고를 읽은 편집장은 고민에 빠졌다. '이념의 선택'을 정면으로 다룬 이 작품은 뜨거운 감자였다.
    편집장 신동문은 발행인 몰래 원고 뭉치를 들고 인쇄소로 갔다.
    밤을 새운 조판은 새벽녘에 끝났다.
    '광장'은 그해 '새벽'지(誌) 11월호에 실리게 된다. 


    [만물상] 역사가 된 최인훈


    ▶"최인훈은 한국 문학과 정치사를 하나로 꿰어놓은 분"이라고 평론가 정과리는 말했다.
    "이광수는 근대문학을 열었고, 최인훈은 현대문학의 출발점을 제시했다"고 했다.

    최인훈은 계몽과 반공에 갇혀 있던 1960년대 인식의 바다에
    단독자·시민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화두를 던졌다.

    누구는 최인훈의 '광장'에서 중립국을 떠올린다.
    이데올로기에 압착된 주인공 이명준은 남과 북에 다 실망했다.
    그러나 그는 도피한 것인가, 아니면 건강한 시민의 광장을 꿈꾼 것인가.

    ▶제자들은 스승 최인훈이 노년에도 건강했다고 말했다.

    술은 아예 입에 안 댔고, 담배도 진즉 끊었다.


    작년에 서울대 법대 명예 졸업장을 받을 때도 몰랐다.

    올봄 정기검진에서 온몸에 퍼진 병을 알게 됐다.

    그는 침상에 지인들을 불러 마지막 대화를 나눴다.


    미·북 회담이 열리던 날은 흥분한 모습이었다.

    통증은 깊었으나 제자들에게 21세기를 내다보는 얘기를 했다.

    목소리가 낮고 발음이 먹혔다.

    6·25 때 소년 최인훈은 폭격을 피해 방공호로 달리다 우연히 어떤 여인 품에 부딪히는데,

    그 뜨겁던 열기의 기억 이 '어질머리'가 되어 문학을 관통했다.

    평론가 김현최인훈을 "웃지 않는 작가"라고 한 적이 있다. 그만큼 진지했다.

    "고독의 심연 속에 스스로를 유폐시켰다"고 제자 이나미는 말했다.


    그는 강의 때 '암중모색'이란 말을 자주 했다. 변화하는 세계를 늘 성찰해야 한다는 작가의 자세였다.

    안개가 짙을수록 빛을 내는 등대처럼 최인훈 문학이 살아 있길 바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23/2018072302884.html


    이승희(mister****)2018.07.2404:54:17신고
    관념과 지성으로 가득찬, 당시 기준으로는 실험적 소설을 쓰려 했던 분인데
    한국에선 그걸 알아먹어 주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외로웠을 것이다.
    70년대부터 연극 쪽으로 간 것도 그런 실망감 때문일듯.
    한국인들이 원체 관념불능자에 유물론자들이라,
    형이상학을 말하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 취급 당하니까.
    '광장'의 중립국행을 말하면서 작가(혹은 이명준)의 정치적 선택을 강조하는 것은 우스운 일.
    발 없는 새처럼 현실에 깃들이지 못했던 한 관념론자가
    피안과 사랑으로 도피(혹은 구원받음)했다는 것이 더 읋은 해석 아닐까?
    625와 남북 이념갈등은 배경일뿐.
    그리고 최인훈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맨날 '광장'에만 매달려 있으면 안 된다.
    그는 '광장'의 작가로만 기억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진면목은 다른 데에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23/2018072302884.html

    2[발자취] '분단이란 수갑' 차고 광장의 자유를 꿈꾼 작가


    조선일보
                                 
               
    입력 2018.07.24 03:01

    소설가 최인훈 별세

    "광장을 가지지 못한 국민은 국민이 아니다"고 했던 소설가 최인훈(84)이
    23일 오전 10시 46분 경기 고양시 명지병원에서 대장암 투병 끝에 타계했다.

    1960년 남북한을 제3의 시선으로 비판한 소설 '광장'을 발표해 냉전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려 했던 작가는,
    "문학 창작은 일종의 사고(思考) 실험"이라며 지식인의 고뇌를 탐구한 소설로 분단 시대를 조명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고인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할 예정이다.

    최인훈은 2015년 국내외 연구자들과 대담한 자리에서
    "6·25 때 원산에서 내려온 내 문학은 피란민의 문학"이라고 했다.
    "최인훈이라는 피란민 작가가 현대 한국이라는 원더랜드(이상한 나라)를 헤매고 다닌 셈"이라고
    자신의 문학 세계를 요약했다.

    문학평론가 정과리는 "최인훈은 한국 정치사와 문학을 하나로 엮은 작가이자,
    우리 정치사를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도정으로 본 지식인이었다"고 추모했다.

    생전의 최인훈은 "현대사라는 수갑을 찬 한국의 작가는 정치와 역사를 빼고 문학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최인훈
    최인훈은 1980년대 말‘광장’을 되돌아본 산문을 써서
    “분단 문제와 관련해 한국 문학이 지닌 기능은
    우리 민족이 통일된 공동체에 대해 지녀온 희망의 기억을 마취와 마멸로부터 지켜내는 일
    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DB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목재상인 집안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해방 후 북한 공산정권이 부친을 부르주아지로 지목해 탄압하자 1947년 가족이 원산으로 이주했다.
    1950년 6·25가 터진 뒤 북진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에 밀려 철수하자
    12월 최인훈 가족은 해군함정 LST를 타고 월남했다.

    최인훈은 목포고를 다닌 뒤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지만
    4학년 1학기까지 다니다 자퇴하곤 군에 입대해 육군 통역·정훈장교를 지내며 틈틈이 소설 습작을 했다.

    1959년 단편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와 '라울전'이 자유문학에 추천돼 등단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사상의 자유가 확대되자 소설 '광장'을 발표해 '4·19 문학의 상징'으로 우뚝 솟았다. '광장'은 몇 차례 출판사를 옮겼다가 1976년 문학과 지성사에 둥지를 튼 뒤
    지금껏 204쇄 70여 만부를 찍는 동안 분단 시대 한국 젊은이의 필독서로 꼽혀왔다.

    '광장'은 남한의 천박한 이기주의를 '광장이 없는 밀실'로,
    북한의 획일적 전체주의를 '밀실이 없는 광장'에 비유해 모두 비판했다.

    남한 청년 이명준이 분단 직후 월북했다가 6·25 때 북한군으로 내려와 포로가 되는데
    종전 후 남북한 모두 혐오한 나머지 제3국 인도를 선택해 배를 타고 가던 중 바다에 투신한다는 비극이다.

    작가는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라며 밀실과 광장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꿈꿨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의 밀실로부터 광장으로 나오는 골목은 저마다 다르다"며
    밀실과 광장을 잇는 '다양한 골목의 만남'을 이상(理想)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최인훈은 '광장' 외에도 지성(知性)에 바탕을 둔 다양한 실험 소설과 정교한 언어 예술을 보여줬다.

    '회색인'과 '서유기'는 지식인의 고뇌를 그린 관념 소설이고,
    '가면고'는 환상적 사고실험(思考實驗)의 산물이다.
    소설 '구운몽'과 '금오신화'는 고전을 패러디해 분단 시대의 상황을 현대적 괴담으로 묘사했다.
    1970년대 이후 희곡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등 전통 설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들을 잇달아 써내
    한국 연극의 기폭제가 됐지만, 소설 창작은 중단했다.

    그로부터 20년 만인 1994년 펴낸 '화두'는 20세기 한국사 체험을 성찰한 소설이다.
    그는 "인생의 어떤 시기에는 자기 생애가 문득 소설처럼 바라보이는 시기가 있다"며
    "소설 '화두'에 내 모든 게 들어 있다"고 했다.

    작가는 2001년 서울예대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한 뒤 2005년 산문집 '길에 관한 명상'을 낸 것을 끝으로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그가 기른 제자로는
    소설가 강영숙·심상대·하성란·신경숙·윤성희·신승철, 시인 채호기·이능표·이창기 등이 있다.

    그는 팔순을 맞아 제자 50여 명이 마련한 모임에서
    "문학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모범 답안이 없다"고 밝힌 뒤 다시 칩거했다.

    유족으로 부인 원영희씨와 아들 윤구, 딸 윤경씨가 있다.
    장례는 문학인장(장례위원장 김병익)으로 치러진다.
    빈소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 25일 9시. (02)2072-2091


    [최인훈 어록]


    ▲광장을 가지지 못한 국민은 국민이 아니다. 밀실을 참지 못하는 개인은 개인이 아니다.

    ▲기억 속에 없는 것을 우리는 표현도 제작도 못한다. 창조란 회상의 능력일 뿐이다.

    ▲바쁜 사람은 역사를 읽을 틈이 없다. 역사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다만 그가 나쁜 역사를 만들고 있을 때가 문제다.

    ▲사관(史觀)을 숭배하는 것은 우습다. 망원경을 숭배하는 것처럼.

    ▲사람은 같은 환상에서 시작해서 다른 현실로 삶을 맺는다. 이것이 슬프다.
    환상의 실현의 차를 줄이자는 것, 그것이 정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23/2018072302914.html



    박성훈(bu****)2018.07.2413:23:26신고
    광장을 읽으며 이명준이라는 청년이 가졌던 절망을 느껴보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상 어디나 완전한 것이 있으리요 다만 정도의 문제이지요.
    절망조차 느낄 수 없는 북에서 태어나 절망이나마 맘대로 이야기 할 수 있는 남으로 온 것은
    잘 하신 일입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23/2018072302914.html

    '광장'의 소설가, 최인훈 별세


               
    입력 2018.07.23 12:20 | 수정 2018.07.23 12:53


    소설가 최인훈. /조선일보DB


    소설가 최인훈(82)씨가 23일 오전 10시46분
    대장암 투병 끝에 입원 중이던 경기 고양시 명지병원에서 별세했다.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6·25전쟁 당시 월남한 최씨는
    1959년 단편 ‘그레이 그락부 전말기’와 ‘라울전’으로 등단한 뒤
    1960년 남북한을 제3의 시선으로 비판한 소설 ‘광장’을 발표해
    냉전 이데올로기 극복을 지향하는 작가로 떠올랐다.

    최씨는 “문학 창작은 일종의 사고실험(思考實驗)”이라며
    지식인의 고뇌를 탐구한 소설로 분단 시대를 잇달아 조명했다.
    관념 소설 ‘화두’와 ‘회색인’ ‘서유기’ 뿐 아니라 풍자 소설 ‘총독의 소리’, 고전 패러디 소설 ‘구운몽’ 등
    다양한 소설 양식도 실험했다.
    전통 설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희곡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와
    현실과 예술을 풀이한 평론집 ‘문학과 이데올로기’도 냈다.
    ‘최인훈 전집’(15권)을 남겼고, 동인문학상·이산문학상·한국연극영화예술상 희곡상 등을 받았다.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지내며 수많은 문인들을 길렀다.
    대표작 ‘광장’은 영어를 비롯해 6개국어로 번역됐다.

    최씨는 지난 2015년 경기 고양시 자택에서 국내외 연구자들과 나눈 공개 대담을 통해

    “6·25 때 원산에서 내려온 내 문학은 피란민의 문학”이라며

    “최인훈이란 피란민 작가가 현대 한국이란 원더랜드(이상한 나라)를 헤매고 다닌 셈”이라고

    자신의 문학 세계를 요약한 적이 있다.

    최인훈 문학은 분단 시대를 남한에서 겪은 피란민 지식인의 이방인 의식과 고뇌를 표출했다는 것이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울먹이는 소리로 독재자의 죽음을 알리는 북쪽 아나운서의 문화 양식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며

    “20세기에 가장 열악한 방식으로 역사에 동원된 우리들의 운명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목재상인 집안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최씨는

    6·25전쟁이 터진 그 해 12월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목포고등학교를 다닌 뒤 서울대학교 법대에 진학했지만 문학에 더 큰 뜻을 둬 자퇴하곤 입대해

    육군 통역·정훈 장교를 지내며 틈틈이 소설 습작을 했다고 한다.

    1959년 단편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와 ‘라울전’이 자유문학에 추천돼 등단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사상의 자유가 확대되자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남북한을 제3의 시선으로 비판한 소설 ‘광장’을 발표했고,

    지금껏 204쇄 70여 만부를 찍는 동안 분단 시대 한국 젊은이의 필독서로 꼽혀왔다.

    소설 ‘광장’은 남한의 천박한 이기주의를 ‘광장이 없는 밀실’로,

    북한의 획일적 전체주의를 ‘밀실이 없는 광장’에 비유해 모두 비판했다.


    남한 출신의 청년 이명준이 분단 직후 월북했다가 6·25 때 북한군으로 내려와 포로가 되는데

    종전 이후 남북한 모두 혐오한 나머지 제3국 인도를 선택해 배를 타고 가던 중 바다에 투신한다는 비극이다.


    작가는 서문에서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라며

    “인간을 이 두 가지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고 써서

    밀실과 광장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꿈꿨다.

    ‘광장’이 사실주의 소설이라면

    소설 ‘회색인’과 ‘서유기’는 에세이 기법으로 지식인의 고뇌를 그린 관념 소설이고,

    소설 ‘가면고’는 환상적 사고실험의 산물이다.

    소설 ‘구운몽’과 ‘금오신화’는 고전 소설을 패러디해 분단 시대의 상황을 현대적 괴담으로 묘사했다.

    1970년대 이후 희곡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를 비롯 전통 설화를 재해석한 작품을 잇달아 써내

    한국 연극의 기폭제가 됐지만, 소설 창작은 중단했다.


    이후 1994년 20년만에 소설 ‘화두’(전 2권)를 냈다.

    20세기 한국사 체험을 성찰한 소설 ‘화두’에 대해 그는

    “인생의 어떤 시기에는 자기 생애가 문득 소설처럼 바라보이는 시기가 있다”며

    “소설 ‘화두’에 내 모든 게 들어있다”고 했다.

    작가는 2001년 서울예대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한 뒤 2005년 산문집 ‘길에 관한 명상’을 낸 것을 끝으로

    사실상 절필한 채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그가 기른 제자로는 소설가 강영숙·심상대·하성란· 신경숙·윤성희 등이 있다.


    그는 2015년 팔순을 맞아 제자 50여 명이 마련한 모임에서

    “문학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며 “모범답안이 없다”고 밝힌 뒤 다시 칩거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원영희씨와 아들 윤구, 딸 윤경씨가 있다.

    장례는 문학인장(장례위원장 김병익)으로 치러지고,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다. (02)207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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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보 '광장' 최인훈 작가 별세… 향년 82세고성민 기자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23/2018072301285.html



    이광대(gust****)2018.07.2312:42:18신고
    "신념은 지식의 아들이다". 평론집 문학과 이데올르기 해설에서 김윤식 교수가 한 말입니다.
    요즈음같은 경박한 지적풍토에서는 나오기 힘든 대작가였습니다.
    하늘 먼곳으로 올라가셨으니 이제 고향인 회령땅도 가보실수 있겠네요...
    윤혜철(h****)모바일에서 작성2018.07.2312:40:59신고
    그가 쓴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로서 참 고마왔다는 말을 전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을 위로합니다.
    고세호(ela*)2018.07.2312:38:05신고
    젊었을 땐.... 한참 파고 들던 작가.... 그러나 파도 파도 빛이 없더군.
    그사이 콩나물 시루짝깥던 버스에는 에어컨이 나오고, 인분 퍼붓던 밭에는 트랙터가 다니고,
    기생충은 어느덧 옛 이야기가 되고.... 그러다 보니 최인훈의 이름도 희미해 지더군.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23/201807230128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