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3[김지하] (조선일보)

colorprom 2018. 7. 28. 19:26


    

3시인 김지하 "이게 내 마지막 시집"


조선일보
                             
             
입력 2018.07.28 03:02

등단 50년 기념 시집 '흰 그늘'에 "이제 그림과 산밖에 없다. 끝"

시인 김지하(77·본명 김영일)씨가 "마지막 시집"이라며 시집 '흰 그늘'을 27일 내놨다.

김씨는 6년 만에 발표한 이 시집을 여는 자서(自序)에
"마지막 시집이다/ 교정하지 않는다/…/ 이제 내겐 어릴 적 한(恨)/ '그림'과 산밖에 없다/ 끝"이라고 썼다.

1969년 등단한 지 햇수로 50년을 기념하는 책이지만
"날씨가 너무 뜨겁다"는 등의 이유로 출판기념회는 보류한 상태다.

김지하 시인
스스로“마지막 시집”이라 밝힌 시집‘흰 그늘’을 27일 내놓은 김지하 시인은 이날
절필하려 했으나 세상이 바뀌어 시를 계속 써야겠다는 생각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명원 기자
다만 이것이 절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김씨는 이날 본지 통화에서
"원래 글을 안 쓰려고 했는데, 나라 형편이 바뀌고 사람들 사는 형편이 달라져서
그림과 미학 논문 및 강연과 함께 시를 계속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다만 "어떤 시를 쓸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작정이 없다"고 덧붙였다.

이번 시집의 책임 편집을 맡은 문학평론가 홍용희 경희사이버대 교수는
"최근 만나 뵀을 때 조선 후기 '정역(正易)' 사상에 등장하는 유리세계(琉璃世界)에 관한 시를 써보려 한다
고 하시더라"고 전했다.

수록작 71편은 모두 국내 정치 격변이 한창이던 2016년에 쓰였고,
시와 정치에서 멀어지려는 저자의 기운은 시집 곳곳에서 발견된다.

"정치는 지랄발광하는데/ 나/ 詩 다시 쓸 수 있을까"('丙申 정월 대보름날')라거나
"詩/ 다아 읽고 난 뒤// 없다/ …/ 지금/ 최근 시 읽었는데도// 없다// 무엇이?// 아아// 詩!"('없다')
라고 썼다.
그해 11월 26일 쓴 시 '바보'에서 김지하는
"박근혜를 지지하면서/ 최순실이를 몰랐고"라며 "바보만이 그럴 수 있다"고 한탄했다.
"이제/ 일체 입을 닫는다, 모든 정치에 다아!"

김씨는 이날 시집과 함께 4년 만의 산문집 '우주생명학'도 동시에 내놨다.
산문집은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쓴 원고 6편을 묶은 것으로,
특유의 생명 사상과 동학(東學)의 기반에 화엄불교와 기독교 등을 종합해 새 문명의 길을 제시하는
이른바 "새로운 동학"이다.

"이제 새로운 국가 목표가 제시되고, 근본적인 요구인 '남녀·음양·빈부' 등의 본질적 해방과 평등이 성취되는… 우주와 생명의 큰 변화 속에서 참다운 '선후천융합개벽'을 이뤄야만 한다"고 썼다.

탄핵 정국 촛불 집회와 한반도 정세 변화에 주목하며
"이제 진보와 보수, 좌익과 우익의 통일, 융합을 생각할 때"라고도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27/2018072703516.html



김정태(jtki****)2018.07.2816:19:19신고
돌아보니, 박종철열사의 부친 박정기선생님도 가셨고, '오적' 시인 은 절필한다 하니,
세월의 무상을 느낍니다.
이상수(challach****)2018.07.2814:32:04신고
심심풀이로 독서하던중 옛날 한국근대 문학가 이효석,김유정, 등등등...
대표작 나이가 대략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인 것을 보고 많이 놀랐다,
요즘 애들 보면 그나이에 세상 정말 1도 모른다,
뭔 잡글을 떠받들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나이 때가 절정기인가 모르겠네~~~
조규혁(qh****)2018.07.2813:18:36신고
부끄러운 삶을 살아 왔다 반성이나 하지>>>>
이태분(leech****)모바일에서 작성2018.07.2813:02:59신고
인생 말년인데 시집 안 사본지 오래 되었다.
옛날 박목월,황금찬,구상 시인 좋아했는데 김지하씨의 시집 봐야 하겠다.
김 시인이 좌파 지지 안 했다고 온갖 욕설과 공격하는 좌파들 보고 참으로 놀랍다.
그대들이 김지하의 생명 경외 사상을 알겠나? 김지하는 큰 산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27/2018072703516.html


2[최보식이 만난 사람]

"내가 못났다는 거요… 난 씩씩한 사람이 못 돼, 겁이 굉장히 많고"


입력 : 2018.03.05 03:06

[시인 김지하 단독인터뷰]

"영원한 진리 아닌 마르크시즘
진보 혁신 떠드는 놈들이 100년 전 하던 얘기를 똑같이, 좀팽이 깡통 좌파로구나"

"감옥에서 박정희 죽음 소식 교도관이 전해주는 순간
'인생무상' '안녕히 가십시오' '나도 곧 뒤따라갑니다'…"

시인 김지하와 통화를 한 것은 대규모 3·1절 집회를 열겠다는 보수 진영의 신문 광고 때문이었다.
주최 측 대표 명단에 '김지하' 이름이 들어 있었다.

"내 목을 걸고 감옥에 간 게 '민주' 앞에 놓은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잖소.
개헌을 한다면서 민주주의 앞에 '자유'를 뺀다는 것에 좋지 않게 생각해.
그래서 내 이름을 넣어도 좋다고 한 것인데, 내가 보수의 리더인 것처럼 광고가 실렸다고 했소?
내 나이 칠십팔이오, 몸도 아픈 내가 지금 정치하게 됐소?
글도 시(詩)도 안 쓰고, 그림이나 그리며 원보 엄마(부인 김영주)만 모시고 사는데…."

술 한 병 들고 강원도 원주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갔다.

"술·담배 안 한 지 오래됐소. 당신도 꽤 늙었구먼. 우리가 얼굴 안 본 지 10년 됐나, 20년 됐나.
김대중 시절 당신 인터뷰로 그쪽 사람들에게 많이 시달렸지…."

김지하는“사람 잡아 조지는 게 정치요? 할 말은 많아도 이젠 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김지하는“사람 잡아 조지는 게 정치요? 할 말은 많아도 이젠 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원주=최보식 기자
―보수 진영에서는 이런 난국에 김 선생께서 나와주셨으면 하더군요.

"내가 어떻게 우파의 리더가 될 수 있겠소.
나는 우파도 좌파도 아니오. 중간파도 아니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걸 내 사명으로 하는 사람이오."

―새로운 길이라는 게?

"한마디로 정의하고 얘기하는 게 힘이 들지만,
우리 전통 속에서 세계적인 보편성을 찾는 것이나
세상을 바꾸는 주체로 여성성(女性性)에 주목하는 것인데…."

―지금 현실의 긴박성과는 떨어진, 너무 추상적인 답변이군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신문기자처럼 말해야 하나, 정치가처럼 말해야 하나. 안 그렇지 않소?
그런 얘기 할 수 있으면 내가 왔다 갔다 하며 돈을 벌지.
나는 아름다울 미(美), 배울 학(學), 미학 전공이오.
예술의 원리와 효과에 관심 있고, 연극 연출, 그림, 시를 해왔잖아.
그렇게 해온 사람의 말이란 애매하고 어정쩡할 수밖에 없는 거지."

―제가 이해 못하면 독자도 이해를 못합니다. 현 정권이 가고 있는 방향은 맞는다고 봅니까?

"이해를 안 하려고 하는 것이지.
현 정권이 모두 맞는다고 생각하면 당신을 이렇게 만나 떠들겠어.
간혹 어떨 때는 이 자식들 봐라, 마르크시즘은 영원한 진리도 아닌데, 그 자체가 변화·발전·진보하는 것인데, 100년 전에 하던 얘기를 똑같이 하나, 진보 혁신을 떠드는 놈들이 그걸 집착해,
좀팽이 깡통 좌파로구나 여기지. 그놈의 똘마니들이니까."

―'그놈'이 누구입니까?

"신문 기사를 보니까 문재인 대통령이 리영희'전환시대의 논리'에 감동받았다고 했더군.
내 인생의 책이라고 그랬나. 백낙청은 자칭 한국 문화계의 '원로'로 행세하고 있고…."

―리영희나 백낙청은 어려운 시절 함께했던 동지(同志) 아니었나요?
관계가 왜 이렇게 비틀어졌는지 궁금합니다.
지주(地主) 집안에 그 시절 하버드대 대학원을 나온 백낙청이 민중을 운운하는 이중성 때문인가요?

"하버드대에서 영문학을 한 그가 어떻게 한국 문학사의 심판관을 해.
내가 장모(박경리)를 알기도 전에, 그는 박경리 소설 '시장과 전장'을 형편없이 깠어.
그런 심미관(審美觀)을 보고 그를 더 우습게 봤어.
리영희는 중국 문화대혁명과 월남전 타령이고, 외신(外信)에 나오는 걸로 자기 사상인 양 떠들었어.
1973년인가 신경림 시집 '농무(農舞)' 출판기념회에서 비위가 틀려 이들과 대판 싸웠어요.
그 뒤 한 선배가 '함께 안 가면 이 동네에서 당신이 외톨이 된다'고 말려 억지로 친해졌던 거지."

―5년 반 전쯤 본지(本紙) 기고문을 통해 이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깡통 좌파'라고 공격해
화제가 됐지요.

"내가 감옥 독방에 갇혀 있었을 때 교도관을 통해 바깥과 연락했어요.
한번은 리영희·백낙청·고은이 함께하는 술자리에 교도관이 앉아 있었어요.
그 자리에서 고은'박경리에게 손자를 업고 시청 앞에서 김지하 석방 플래카드 들고 시위하라고 했더니
과부년 주제에 말을 안 들어. 하라고 하면 할 것이지'라고 떠벌리자, 리영희·백낙청이 낄낄 웃더라는 거야.
그 얘기를 교도관에게 전달받았소."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을 때 '역사와의 화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김지하가 이렇게 변절할 수가 있나'라는 당혹감도 있었습니다.

"여성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소. 인류 역사의 변화가 감지됐어요.
동학에 의하면 후천(後天) 시대가 도래하고,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에는 우주가 여성성으로 바뀌며 그늘이 빛을 감싸게 되며,
천부경(天符經)에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구절이 나오고…."

그의 설명이 십여 분 넘게 이어져, 중간에 말을 끊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박근혜 후보에 대해 '부모님이 흉탄에 돌아가셨고
18년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내공이 있을 거다'라고 했지요?

"제 아비로부터 정치를 배웠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친하게 지낸 선후배들이 찾아와 좋게 얘기를 하며 '박근혜를 한번 만나라'고 했어요.
내게 찾아오겠다는 전갈이 왔을 때,
'지학순(池學淳) 주교의 무덤에 가서 정권 잡으면 유신 체제처럼 안 하겠다고 큰소리로 다짐하고 오라'
하니까, 실제 그렇게 하고 찾아왔어요."

―그 전부터 알아온 게 아니라 그때 처음 봤다는 것이군요. 어떤 대화를 나눴습니까?

"그의 아버지 얘기를 꺼냈어요.
감옥 독방에서 내가 미친 증세가 와서 100일간 참선을 했어요. 참선이 끝나는 바로 그날 박정희가 죽었어요. 교도관이 전해주는 순간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소.
'인생무상' '안녕히 가십시오' '나도 곧 뒤따라갑니다'.
나처럼 박정희 미워한 사람 별로 없었을 텐데.
다음 날 교도소 TV를 통해 미사를 집전하는 김수환 추기경을 봤어요.
그분이 한참 침묵한 뒤 '인생무상'이라며 나와 똑같은 말을 하더군. 그때부터 내가 웃기 시작했어요."

시인 김지하(오른쪽)
―이런 얘기를 들려주니까 박 후보는 어떻게 반응하던가요?

"웃지도 울지도 않고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부모가 총 맞아 죽고 난 뒤 18년을 고독 속에서 지내면서 생긴 내공이 아닌가 싶더만.
그래서 내가 '당신을 잘 모르지만, 이런 고통을 에너지화해서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중요한 것은 문화인데 모든 것을 문화와 연결시켜 해주기 바란다'고 말했소."

―그렇게 평가했던 박 전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는데.

"제 아버지에게 정치를 배웠으면 치밀한 정치 패거리가 있겠지,
그 패거리가 돕지 않겠는가 했는데. 그게 안 보였어.
임금처럼 만기친람이었어.
어디서 최순실이 같은 여자가 튀어나와 야단법석이 될 줄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어."

―구속 수감된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어떤 감상이 있습니까?

"이명박도 구속시키려고 하지 않소.
'적폐 청산'이 말은 그럴 듯하나, 정치가 사람 잡아 조지는 것인가. 그게 정치요?
할 말은 많아도 나는 이제 하지 않아."

―김 선생을 보면,
짧았던 젊은 날의 어떤 신념과 선택이 그 뒤의 길고 긴 세월을 모두 결정짓는 것 같습니다.

"젊은 날 나는 정치(시국투쟁)를 할 생각이 없었소.
옆에서는 자꾸 하라고 했지만, 나는 그런 조직에는 안 들어갔지.
나는 시·연극·드라마 같은 문화에 관심이 있었소.
대학 시절 은사는 내게 '노자(老子)를 읽어라. 허무에서 배워라'고 했고,
'서양 미학을 배우는 대학원에 진학하지 말고 거리의 미학자가 되라'고 했소.
그런 괴상한 가르침을 받은 그대로 나는 시 쓰고 거리의 미학자가 된 거 아니오."

―'허무(虛無)'를 공부했다면서 어떻게 독재 정권과 맞서는 투사가 되고 저항 시인이 됐습니까?

"우리 집안은 동학(東學)이었소. 전기기술자인 아버지는 자생적 공산주의자였소.
하지만 6·25 때 북한의 지령을 받는 진짜 공산주의 그룹에서 아버지 계열은 청산됐어.
그 뒤 자수하고 전기조명 기사로 국군에 편입됐어.
6·25가 끝나자, 공산주의자로 찍혔던 고향 목포에서 원주로 이사를 오게 된 거요. 내 나이 열세 살 때.
왜 집안의 영향이 없었겠소. 마르크스 책을 봤지만 내 성향은 운동조직과 맞지 않았소.
유물론·변증법·잉여론 같은 것도 마음에 안 들었어요."

―6년 반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난 뒤로는 생명사상을 들고 나왔지요?
운동권 진영에 '김지하가 변했다'며 당혹감과 충격을 줬지요?

"감옥 안에서 '동경대전'을 읽고 동양 정신의 세계로 들어갔지요.
생명과 환경, 농업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사실은 그 이전부터 내 안에서 싹트고 있었던 것들이지요."

―자신이 살아온 삶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만날 얻어터지기만 하고 빛을 못 보고 살았지요."

―'김지하'라는 이름을 얻었고, 서로 모셔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중요한 거요? 그게 좋은 거요? 그걸 바라고 살아온 사람 같소?
잘 살아온 것도 아니지만 잘못 살아왔다고 얘기하고 싶지 않지만…."

―돌아보면 어떤 점이 가장 아쉬움으로 남습니까?

"많지요. 중요한 것은 내가 못났다는 겁니다. 나는 씩씩한 사람이 못 돼. 원래 겁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오.
감옥을 예감하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결심해야 돼. 적당히 결심하지 못해.
집사람은 이를 잘 알지. 그래서 고통 받았지.
집사람한테 늘 미안해. 워낙 고생을 많이 했어."

―그런 기회는 없겠지만, 가정해서 또 한 번 삶이 주어지면 이렇게 살 겁니까?

"남들에게는 어떻게 비쳤을지 모르나 내가 찾으려는 것은 아름다움이었지.
나는 어둠 속의 '흰 그늘'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늘에서 기적 같은 흰빛, 그런 아름다움을…
내가 살아온 삶을 똑같이 살고 싶지는 않은데 그런 원리를 찾아가겠다는 바람은 변함없소."

이제 그는 걸음걸이가 불편한 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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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04/2018030401888.html



김영철(koyang****)모바일에서 작성2018.03.0513:15:47신고
십년 전인가 어느 가을날, 일산 롯데백화점 앞에서 조우했었지요.
부산대학에서 촛불 관련 강연을 마치고 오는 길이랬지요.
저에게 그날 그 강연 원고주신것,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역설이 없습니다.
그 때 선생은 촛불을 희망적인 것으로 보았었지요. 그런데 오늘의 촛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선생의 답답해 하시는 모습에 저도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최수조(cg****)모바일에서 작성2018.03.0513:14:41신고
쓰레기같은 한국의 지적 풍토에 빛나는 보석과도 같은 존재.
오적과 탈 그 속에 담겨있는 선생의 고통받는 서민들의 아픔에 대한 사랑에 대해
깊은 경외심을 가집니다. 남아있는 금생의 시간들 청안하소서.
오승희(sunny****)2018.03.0513:03:02신고
소위 운동권의 이념적 배경을 명확히 밝혀준 인터뷰입니다.
젊은 세대들이 눈여겨 보고 가슴에 새겨야 할 기사입니다.
조윤래(mitoo****)모바일에서 작성2018.03.0512:51:49신고
늘 건강하시고 암흑윽 시대에 빛이되시고 나침판이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임광일(dlarhk****)2018.03.0512:36:35신고
제 정신가지고 깡통 깡패들하고 함께 할 수는 없었겠지.
젊어서 한번쯤 깡통 깡패안되어 본 인간도 드물겠지만
나이들어서도 깡통 깡패로 남아 있는 인간들은 머리가 빈게 틀림없다.


[Why] 진보가 뭔지도 모르고 친북이니 종북이니

투사는 용납할 수 없었다

  •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 2018.02.24 03:02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14>김지하(1941~)

    처음 필명은 '地下'였는데 어느새 잔디밭과 강의 '芝河'로 변해 굳어져
    정치인과 재벌 싸잡아 비난한 '오적'으로 유명세
    군사독재 끝나고 '생명'으로 다시 놀라게 한 탈속한 신선 같은 시인

    동아일보 주필을 지냈고 국사학에 일가견을 가졌던 천관우가 어느 날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역사에 남을 만한 것이 없지만 김지하의 일은 역사에 남을 겁니다."

    국사학계에 참신한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던 천관우의 한마디였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그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김지하가 한 일은 우리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나도 믿고 있다.

    김지하
    이철원 기자
    그는 1941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 얼굴이 오늘도 매우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의 아버지는 귀태(貴態)가 엿보이는 점잖은 얼굴의 소유자였고 전기 기술자로 생계를 이어 갔다.
    김지하와 나의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그의 어머니도 자주 만나게 됐는데
    생활이 어려웠던 탓이겠지만 그의 어머니는 세파에 시달린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뛰어난 남도 미인이었고
    김지하의 젊었을 때의 모습은 그의 어머니를 닮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의 어머니는 남도 미인답게 상냥하고 싹싹한 미소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줬다.

    김지하가 원주로 이사 온 동기는 분명히 모르지만,
    그는 원주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있는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공부를 썩 잘하던 김지하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미학과에 입학해 1966년에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지하는 학생 시절부터 나라가 돌아가는 꼴을 보고 크게 분개했고
    한·일 국교 정상화가 군사 정권에 의해 강행되던 때 학생 시위의 일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시절 그의 멘토는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였고,
    그가 문단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1969년 '황톳길'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의 필명이 처음에는 땅 아래를 뜻하는 '지하(地下)'였지만
    어느새 그의 필명은 잔디밭과 강을 뜻하는 '지하(芝河)'로 변해 굳어져서
    그의 본명이 김영일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이미 ·일 국교 정상화 반대 시위에 가담했기 때문에 4개월이나 감옥 생활을 해야 했고,
    1970년 정치인과 재벌을 싸잡아 비난·매도하는 시 '오적'을 발표했는데 그것이 반공법을 위반하였다 해
    체포돼 그 시를 게재한 '사상계'의 대표 부완혁과 같은 감방에 한동안 갇혀 있었다.

    김지하의 이름은 이 나라 학생층과 지식인 사회에서 이미 거물로 기억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와중에 그는 박경리의 딸이면서 연대 사학과를 졸업한 천진난만한 규수 김영주와 결혼해
    원보와 세희, 두 아들이 태어났다.

    이미 반정부 운동으로 우뚝 선 김지하는 속칭 민주학련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몰려
    거처를 여러 번 바꾸면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눈을 피해 다녔는데,
    그때 나와 김지하의 연락을 맡아준 이화여대 사회학과 학생의 이름은 장하진이었다.
     
    나중에 초대 여성가족부 장관을 지낸 장하진김지하를 존경했기 때문에
    자기에게 닥쳐오는 시련을 마다치 않고 김지하를 위해 온갖 수고를 감수했다.

    나도 남산 중앙정보부에 자주 잡혀가던 시절, 정보부의 지하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던 때였다.
    나를 신문하던 오치억 계장이 내게 이런 말을 한 것이 기억난다.
    "장하진이라는 학생 아시죠. 매우 무서운 젊은 여성입니다.
    내 앞에서 새빨간 눈을 부릅뜨며 '이 정권은 곧 망해야 해'라고 소리를 버럭 지르는데 보통 여자가 아닙니다."

    1970년대 뜻있는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김지하의 위치와 영향력이 그 정도였다.

    김지하는 천재적 소질을 여러 방면에 타고난 사람이다.
    군사 정권의 간담을 서늘케 하던 그가 '비어(蜚語)' 또는 '구리 이순신' 등으로 한 시대를 휘어잡고 나갔는데 군사 독재의 시대는 끝나고 자유민주주의가 가능한 시대가 됐을 때 김지하
    그가 원했다면 장관 자리 하나는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차원 높은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
    세상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언젠가 그는 자기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보면서
    한 인간으로서 절대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다 털어놓았다.
    양심선언이나 참회록도 그렇게 철저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고민을 다 들어주면서도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준 원보의 어머니는 참 훌륭한 여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진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진보라는 깃발을 들고 나와
    친북이니 종북이니 하는 어쭙잖은 가치를 내세우는 작자들을 단연 멀리했다.
    대한민국을 어지럽히는 인간들을 향한 그의 확고부동한 자세는
    강남 일대에서 샴페인을 마시면서 무산자 혁명을 꿈꾸는 한심한 인간들과 달랐다.

    젊어서부터 김지하는 건강이 썩 좋지 못한 젊은이였다.
    그가 중앙정보부 감시하에 마산요양병원에 수용돼 있다가 풀려나 서울에 올 때
    중앙정보부는 나를 지도교수로 정해 내가 마산까지 가서 함께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오게 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탈속한 신선 같은 시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가 나에게 그려준 난초는 대원군을 저리 가라 할 만큼 수준이 높았다.

    나는 김지하와 내가 같은 시대를 살아오며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고민을 하며 함께 존재해 온 사실에
    보람과 긍지를 느낀다.
    천관우가 남긴 말을 되새겨본다. 김지하는 우리 역사에 틀림없이 남을 것이라는 그의 한마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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