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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님]"동물원 같던 집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평생 자산 됐다" (김지수 기자, 조선일보)

colorprom 2018. 7. 28. 19:51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동물원 같던 집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평생 자산 됐다"


             
입력 2018.07.28 06:00 | 수정 2018.07.28 14:40

50년 전 파독(派獨)간호사에서 거장 화가 된 노은님
“창작의 고통? 아픈 순간 없어… 저절로 나오는 게 그림"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날씨처럼 받아들이면 사는 게 편해"

50년 전 신문에 난 파독 간호보조원 모집 공고를 보고 한국을 떠났던 노은님.
지금은 세상에 없던 그림을 그리는 독일 미술계 거장이 됐다./이덕훈 기자

한국엔 여전히 차가운 단색화가 최고 경매가를 갱신하며 기록 순항 중이고,
미국엔 제프 쿤스가 키치와 팝아트로 쇼비즈니스의 파워를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그래피티 화가 뱅크시는 파리에서 낙서로 난민의 메시지를 전한 후 행방이 묘연하고,
서울의 법정엔 조영남이 ‘대작’ 혐의로 실형을 받고 항소 중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돈과 메시지와 그림 노동의 진위가 엇갈려 소용돌이치는 미술계에 노은님이라는 특별한 화가를 목격했다.
양주 시립 장욱진 미술관의 ‘심플' 전시회에서였다.

노은님의 그림에는 원시적인 생명력이 흘러넘쳤다.
한 번의 붓질로 완성된 고독한 오리, 화염 같은 노을 속에 번뜩이는 검은 개, 태곳적 바다 생물,
고함치는 원숭이, 산으로 올라간 거북이, 나비가 되려는 인간…
누군가는 그것을 독일 표현주의의 절정이라 했고, 누군가는 그것을 수묵으로 그린 시라 했다.
언젠가 지구에서 잉태되었거나 퇴화하였을 그 사랑스러운 무명의 돌연변이들은
노은님의 화폭 속에서 제 생긴 대로 화평했다.

각자의 생명은 제 형상을 원망하지 않았고, 힘으로 충돌하지 않았고,
자연의 순환 앞에서 순하게 제 몫의 시간을 품었다.
개구쟁이 조물주가 빚어낸 세상은 이토록 천진난만해
‘혹 내가 신의 실수로 태어난 게 아닌가’ 불행해 하는 현대인을 위로했다.

여전히 예술적 ‘가임 능력’이 탁월한 72살의 화가 노은님을 추적했다.
한국인인 동시에 독일인인 노은님.
23살에 파독 간호사로 고국을 떠났다 예술가의 DNA로 세계 미술계를 놀라게 한 운명의 여인.

양주시립장욱진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노은님의 전시.
장욱진과의 2인전으로 8월 26일까지 지속된다.

노은님은 독일 서남부 헤센주의 미헬슈타트에 있었다.
천년이 넘은 고성에 딸린 극장을 개조한 작업실에서 매일 ‘어떻게 놀까' 궁리하며.
55살에 만난 결혼한 쌍둥이 같은 남편과 함께였다.
남편 게리하르트 바치(75세)는 국립함부르크조형예술대학에서 30년,
노은님은 20년을 교수로 지내다 은퇴했다.

얼마 전 양주장욱진시립미술관에서 시작한 전시 오프닝 행사를 위해 잠시 한국에 머물렀던 그녀를
간발의 차이로 놓쳐서 아쉬워하던 차.

지구가 한 동네라 전화번호를 묻고 물어 통화했다.
나는 폭염에 흐물거리는 오후 5시의 광화문에 있었고 그녀는 아침 9시의 미헬슈타트에 있었다.
커피 한 잔 마시고 게으름을 피우다 작업실에서 점 몇 개 찍고 왔다고 했다.
심지가 분명한 육성 사이로 간간이 청명한 웃음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개울물처럼 흘러들어왔다.

독일 서남부 헤센주 미헬슈타트의 고성. 프랑크푸르트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다.
노은님은 그 옆에 딸린 3백년된 극장을 작업실로 개조해서 살고 있다.

-미헬슈타트는 어떤 곳인가요?

“천 년이 넘은 고성이 있고 공주도 살아요(웃음). 창문 열면 하얀 오리가 나만 쳐다보죠.
뒤 개울엔 숭어와 가재가 왔다 갔다 해요. 밤이 되면 여우도 있고 아침엔 사슴을 만납니다.
온통 숲속 숲속 숲속에 짐승들이 이웃이죠.”

한국에서처럼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나면 피곤하다고 했다.

-그림에 억압이 한 줌도 없습니다. 신기하더군요.

“(놀라며)어떻게 억지로 그려요?
그림도 인생도 억지로 해서 되는 게 없어요. 저절로 때가 되면 나옵니다.
작가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억지로 싸우다 보면 되는 게 없어.
싸운다는 건 버티는 거야. 그러면 빳빳해져. 부드러워져야 술술 풀리죠.”

-자연 속에 있으니까 그러시죠. 여기 도시인들은 ‘버티며' 겨우 하루하루 삽니다.

“저도 하루아침에 된 게 아녜요.
고생하며 헤매고 살다 보니 가장 어렵고도 쉬운 게 ‘놓는 것'이라는 걸 저절로 알게 된 거죠.”

그녀에게 가장 많이 붙는 수식어는 파독 간호보조원 출신의 세계적 화가다.
1970년 23살에 독일로 갔고 3년간 함부르크 항구 근처의 시립병원에서 뱃사람을 돌봤다.
고국에서나 독일에서나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나,
어느 날 병석에 누운 그녀를 찾아온 간호장이 침대 밑에 숨겨둔 스케치북을 발견해 전시회를 열어줬다.

26살부터 인생 대반전이 시작됐다.
함부르크 국립예술대학에 다니게 됐고,
요제프 보이스·백남준 등 거장들과 '평화를 위한 비엔날레'에 초대되고,
동양인 최초로 유럽의 국립미술대학의 교수가 됐다.

붉은 배경에 검은 개를 그린 ‘해 질 무렵의 동물'은
카프카의 ‘변신’과 나란히 프랑스 중학교 문학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그 유명한 함부르크 알토나 성요한니스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대작업,
서울 강남LG타워의 유리벽화, 강원도 문막 오크밸리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노은님의 작품이다.

억압이 느껴지지 않는 노은님의 작품들.
힘이 넘치는 드로잉에서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색면을 가득 채운 동물 페인팅이 시선을 끈다. 스케치 없이 한번에 그려내는 노은님은
‘예술은 문이 열리는 순간 잠시 머물다 떠나는 손님같다'고 했다.

-23살에 독일에 간호보조원으로 떠났다가 유럽 화단의 독보적인 존재가 되셨어요.
선생에겐 옛날이야기지만 혼돈의 시대를 사는 한국인들에겐 여전히 극적인 반전 스토리입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는 한국에선 아픈 과거로 이야기됩니다만.

“괜한 오해는 말아요.
영화 ‘국제시장'에서 나온 것처럼 광부와 간호사들이 다 그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진 않았어요.
밤 근무를 하느라 힘이 들긴 했어도 다들 잘해줬습니다(웃음).
무엇보다 우리 집은 부잣집은 아니었지만 좋은 환경이었어요.
아버지가 동물과 아이들을 좋아해서 우리 집은 동물원 같고 고아원 같았어요(웃음).
집 주변엔 산과 개천이 많아 물고기 잡고 열매 따 먹으며 놀았죠.
아버지는 항상 호기심에 가득 차서 “이거 봐라, 저거 봐라"하셨고, 하지 말라는 게 없었어요.
“너희들은 나쁜 짓 안 할 애들이니 참견 안 하련다.” 9남매에 다 그러셨어요.
억압 없이 자유롭게 컸습니다.”

애들 기르고 동물 기르는 재미로 사셨던 아버지는,
개집에 신문지 깔고 들어앉은 소녀 은님을 위해 전등을 달아주고 커튼을 쳐주었다.
“그 안에서 개 한 마리와 비둘기를 데리고 살았죠.
물고기를 잡아 우물에 넣은 후 겁 없이 우물 벽을 타고 내려가 밥을 주고 오면,
어머니는 “물고기가 어떻게 물을 따라 여기까지 왔을까?” 의아해했어요(웃음).”

어쩌면 노은님의 예술적 DNA는 어린 시절의 환경에서 태동한 듯싶었다.

-멋진 유년이 평생을 결정했군요.

“맞습니다. 나는 그렇게 자유롭게 컸어요.
독일에 가기 전엔 포천에서 결핵관리요원으로 일을 했어요. 거기서도 일 끝나면 문맹 노인들을 가르쳤어요.
그러다 어느 날 신문에 독일 간호사 모집 광고를 본 거죠.”

둥근 곱슬 머리가 매력적인 젊은 시절의 노은님. 눈에 총기가 가득하다.

들어보면 그녀의 독일행은 대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희생이라기보다 신세계로의 탈출에 가까웠다.
해외개발공사 가서 서류를 내고 3개월 만에 떠났다.
“비행기 안에서도 ‘잘못 탔으니 내리라고 하면 어쩌나’ 안절부절못했답니다.”

-새로운 세계로의 엑소도스군요.
성격과 운명을 바꾸려면 낯선 곳으로 가야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갑작스러운 타지 생활에 어려움이 많았겠습니다.

“9명이 한 병원에 배속이 됐는데, 한동안 잠을 못 자고 밤마다 뛰어다녔어요.
유럽의 여름은 백야가 있어서 해가 지지 않는데, 우린 왜 밤이 안 오나 불안해서 헤매고 다닌 거죠.
나중에 간호장이 와서 커튼을 쳐줬을 때 깜짝 놀랐어요.
세상에 낮을 밤으로 바꾸는 이런 신기한 물건이 있다니…(웃음).
같이 모여 노래를 부르며 시름을 잊었는데, 그때 부른 노래가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내 빛…’이었어요. 그런데 그 곡이 또 크리스마스 번안곡이라 한여름에 캐럴 부른다고 독일인들이 어찌나 신기해들 하던지요(웃음). 젊었으니 그렇게 저지르고 살 수 있었지요.”

왜 어떤 사람에게는 비참할 법한 삶도 노은님에겐 크리스마스 동화처럼 다가오는 걸까?
간호장의 주선으로 병원 회의실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그림을 팔았다.
그림값으로 받은 2,000마르크가 왠지 훔친 돈 같아 동생들 학비에 보태쓰라고 한국으로 보냈다.
당시 받던 한달 월급이 400마르크였다.

전시회 뉴스가 함부르크 지역 신문 1면에 났고, 칸딘스키파울 클레의 제자였던 한스 티먼의 제자가 됐다. 파독 간호사는 3년 만에 세상에 없던 그림을 그리는 동양의 화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열린 노은님의 첫 전시회를 다룬 함부르크 신문.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한국에선 불가능했을 거예요. 한국에서 배우질 않았기 때문에 본 대로 느낀 대로 그릴 수 있었지요.
독일에선 개성을 중요하게 봐줬거든요.”

-국립 함부르크미술대학에선 무엇을 배웠나요?

“처음엔 잔뜩 주눅이 들어서 시작했어요.
티먼 교수가 “뭐가 하고 싶으냐?”고 해서 “전 그저 오라고 해서 왔어요. 뭘 할지 모르겠어요" 그랬죠.
아무도 날 안 쳐다봐서 착하게 보이는 학생 붙잡고 “뭘 해야 하느냐?”고 물었죠.
그 학생이 주는 대로 연필 깎아서 새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다들 집에 가고 나면 혼자 남아서 그려서 쓰레기통에 버렸어요.
그런데 어느 날 티먼 교수가 그걸 발견해서 학생들에게 보여줬어요.
“30년 교수 생활하면서 이런 그림은 처음 본다"면서요.
지금도 전 학생들을 가르칠 때 그 순간을 생각해요. ‘왜 그분이 쓰레기통에서 내 그림을 꺼냈을까?’”

-왜 선생의 그림은 침대 밑에서도 쓰레기통 속에서도 발견되는 걸까요?

“하하하. 전 마냥 창피했었어요. 내 그림은 유치원생이 그린 것 같아서 숨겨놨었는데…
다른 사람 것은 제대로 된 추상화고 내가 그린 건 아동화 같았어요.
그런데 그분이 그러더군요. “걱정 마라. 네 그림은 진짜다. 다른 것은 건성이야.”

독일에선 시험 볼 때도 개성을 중시했어요. 오히려 잘 그린 그림은 퇴짜를 놔요.
일례로 한국 미술 대학에서 석고 데생 시험 치는 걸 이곳에선 이상하게 생각하죠.
너희 나라 사람들은 왜 맨날 죽은 사람을 그렇게 아등바등 똑같이 그리느냐"고요.”

-기초 기술이 탄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겠지요.

죽은 걸 그리는 게 기술입니까? 한국 교수들이 배운 스승이 다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일본인들이 당시에 파리에서 그렇게 배웠거든요.
과거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똑같은 상태를 재현하는 건 예술이 아니에요.
10년 내내 책상 다리를 4개로 만들면 목수지만, 어느 순간 3개를 붙이면 예술입니다. 개성이 생명이에요.”

빗자루와 붓자루를 동시에 쓰는 노은님의 자유분방한 작업실.
캔버스도 대형 한지를 쓰며 그림은 위 아래 정방향이 없다.

-개성을 가르칠 순 없지 않습니까? 선생은 독일 국립대학의 교수로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저는 가르치지 않았어요. 볼 기회를 많이 줬습니다. 장님으로 살다 눈을 뜨면 얼마나 볼 게 많습니까(웃음). 사시사철 변하는 자연과 살아 있는 생명을 느끼게 해줬지요.
색채도 가르쳤지만 제가 가르친 건 세상에 미운 색이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밉게 보인다면 그건 그 옆에 어떤 색이 모자라서죠.
흰색과 검은색조차 그 안에 얼마나 다양한 색이 있는지 모릅니다.
수많은 색이 섞여 비단처럼 검은색이 되고 흰 장미 한 송이에도 온갖 색이 다 깃들어있지요.
겉으로는 안보여요. 들여다봐야 보이지요.”

-학생들이 잘 따라오던가요?

“학생들 데리고 모래사장이나 개펄에 가요.
붓 말고 조개 조각이나 나뭇가지를 주워서 마음껏 그리라고 해요.
코딱지만 한 붓 쥐고 좁은 캔버스에 갇히지 말고 넓은 데서 마음껏 그리라고요.
얼마나 즐거워들 하는 지 몰라요.
의무적으로 와있는 아이들은 저도 간섭 안 해요(웃음). 본 대로 느낀 대로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하라는 거죠.”

-즉흥적이라… 선생의 인생과 닮았군요. 설계대로 살고자 하는 보통 사람에겐 두려운 일입니다.

“충분히 보고 느껴야 즉흥적으로 나옵니다. 먹은 데로 싸는 것과 같은 원리죠(웃음).”

-그런 면에서 백남준 선생과 깊이 통했던 거로 압니다.

백남준 선생은 적어도 50년은 앞서서 사시던 분이었어요.
독일 미술관계자가 그러더군요. 당대를 사는 남자 중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다고.
제가 다니던 함부르크 국립미술대학 초대교수로 계실 때
1985년에 ‘평화를 위한 비엔날레'에 함께 참여했어요.
요셉 보이스가 아파서 못 온다고 하니 피아노 위에 전화기를 놓고 불러내서 음성 퍼포먼스를 하시더군요.
머리가 정말 좋았어요.”

백남준, 요셉 보이스와 함께 ‘평화를 위한 비엔날레(1985년)'에 초대됐을 당시의 팜플렛.


-즉흥성도 구구단처럼 몸에 익어야 나오는 법이지요(웃음).

“그분은 나름의 비전이 있었지요.
한번은 카셀도큐먼트 인터뷰에서 양말을 싹둑 자르는 걸 TV에서 봤어요.
다음날 아내인 구보타 시게코 여사와 함께 제 기숙사로 오셨는데 잘린 양말을 그대로 신고 계셨어요.
TV에서 봤다고 하니 “밥을 위해서 무슨 짓인들 못 합니까?” 하며 웃으시더군요.
쇼맨십도 지혜도 충만한 분이었어요.”

한국 예술가의 존재가 미미했던 1980년대, 타지에서 거칠 것 없이 살았던 두 예술가의 만남에
잠시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미 세계적인 아티스트였던 백남준노은님을 예술적 동지로 품었다.
뉴욕과 파리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녀에게 ‘뉴욕 작가들은 철새와 같으니 유럽에서 활동하라'고 조언했고
독일 미술계 인사들에게 노은님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그녀가 아직도 못잊는 일화 하나.
“함부르크는 겨울은 길어요. 공항까지 미끄러운 길을 운전해서 모셔다드린 적이 있어요.
과속을 했더니 “제발 천천히 가요. 노은님 씨랑 나랑 죽으면 한국 미술사에 큰 손해야" 하셔서
한참 웃었습니다.”

-적재적소에서 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셨습니다.

“그렇지요?(웃음). 묘하게도 그림 들고 나가서 ‘나 누구예요' 한 적이 없어요.
제 그림은, 뭐랄까. 지나갔다가도 다시 와서 확인하게 되는 그림이라고 그러더군요.
어디 영화 배경에 나와도 표가 나게 특이하다나요.”

원시적인 생명력과 동시에 장난끼가 느껴지는 노은님의 그림./사진=김복기

-수많은 생명체를 그리셨어요.
어떤 형태가 몸속에서 꼬물꼬물 태동하다가 마침내 선생의 손끝을 뚫고 나오는 것 같습니다.
혹시 아이를 낳는 느낌인가요?

“출산이라면 순산도 있고 난산도 있을 텐데, 전 난산은 없어요. 제일 쉽게 나오는 게 그림인걸요.
(쾌활하게)전 붓 가는 데로 마음대로 그려요. 그런데 아픈 순간은 전혀 없어요. 저절로 되는 거예요.”

-좀 기운이 빠집니다. 이를테면 창작의 고통 그런 게 없다는 말씀이세요?

“하하하. 그만큼 고생을 했어요. 이젠 가벼워진 거죠.
화가는 이를테면 어부와 같아요.
어부가 그물이 찢어지게 잡히는 날도 있고 빈 그물로 돌아오는 날도 있지요. 계획도 없고 보장도 없는 거예요. 즉흥적으로 그려서 쉬운 것 같아도 서너 번은 뒤집어요. 빈대떡 부치듯이요(웃음).”

동영상으로 그녀가 작업하는 풍경을 보았다.
여기저기 널린 커다란 한지, 큰 붓과 빗자루를 들고 경계 없이 오가는 모습은
성스러운 청소부 같기도 하고 물감 난장 하는 어린 아이 같기도 했다.

-인생 고생이라면 어떤 부분이 그리 고통스럽던가요?

“여자 혼자 외국에서 뿌리내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온종일 걸어도 아무도 내게 말 걸지 않는 날이 많았어요. 어린애 취급도 많이 받았어요.
“내가 누구인가?” “내가 있는 땅이 어딘가?” 그런 질문을 많이 했어요.
다른 사람은 남자도 있고 돈도 있는데(웃음), 나는 왜 하나도 가진 게 없나(한숨).
병원 일도 하기 싫어서 사는 게 꼭 벌 받는 것 같았지요.
더 무시무시한 건 자고 일어나도 같은 날이 반복된다는 거예요.”

-벌 받는 것 같던 마음을 다스리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결론은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거죠.
내가 벌 받고 사는 게 언젠가는 그림으로 나올 거다, 그게 작품의 힘으로 나올 거다...
지금 가볍게 그리는 건 그때 벌을 잘 받아서죠.”

-고향은 어디라고 느낍니까?

“언니 한 사람 빼고는 형제들이 모두 외국에 살아요. 그래서 제가 집에 간다 그러면 미국이에요.
제 남편은 독일인이지만 남미에 집이 있죠. 방학이면 우리는 아프리카를 돌아다녔어요.
저한텐 지구가 한동네예요. 지구는 돌고 저는 우주 속에 산다고 느낍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오래된 미술관을 다니며 고대인들이 남긴 벽화와 토기를 보면 깜짝 놀라요.
살아남은 흔적들이 어찌 그리 똑같은지… 그래서 제 그림의 형상은 점점 더 단순해지고 원시적으로 돼요.
본 만큼 겪은 만큼 느낀 만큼 나와요.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적게 먹으면 작은 똥 싸고 많이 먹으면 굵은 똥 싸는 거라고, 그녀가 호탕하게 웃었다.

생명의 순환을 표현한 나뭇 인간 작품과 퍼포먼스.
그녀는 오선지에 새들을 그려놓고 피아노를 치거나
나무로 만든 개를 끌고 시내를 활보하기도 한다./사진=노은님 제공

노은님이 처음 그림을 그린 건 어머니 때문이었다.
독일로 가기 전, 9남매를 낳고 마흔둘에 돌아가신 엄마 사진을 들고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실을 찾아갔다.
초상화료가 너무 비싸 그리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확대경 놓고 땀구멍만 베끼기에 세 번 만에 그만뒀다.
비싼 물감이 아까워 독일에서도 심심하면 끄적거리던 게 지금의 그림이 됐다.

-가끔 어머니 생각을 합니까?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머리 검은 모든 짐승은 고난을 안고 사니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고.
더 오래 살았으면 다정하게 지냈을 텐데… 제게 예술적 자원을 주고 가셨습니다.”

-남편은 어떤 분이지요?

“학교에서 만났어요. 미술사와 철학을 가르쳤어요. 남편이 30년, 제가 20년 같이 교직 생활을 했지요.
55살에 만나서 결혼했어요. 저보다 더 장난꾸러기죠.
작업실에서도 제 자리 뺏어서 아무 데서나 그림을 그립니다.
남자는 아기와 같아서 저는 왕아기를 모시고 살아요(웃음).”

남편 게르하르트 바치와 함께. 두 사람은 소꼽친구 같다.




-종교는 없습니까?

“없습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이유는 내가 자연의 흐름 안에서 소멸한다는 사실이 무서워서죠.”

-여백을 남기면 아시아의 그림, 여백을 칠하면 유럽의 그림이 된다고 하셨어요.
독일 표현주의의 색면과 동양의 선이 한 작가의 세계에 공존하는 게 저는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놀랄 거 없어요. 섞어야 그림이 되죠.
독일도 기독교 나라지만 이젠 교회는 텅텅 비고 부처 장식이 인기지요.
종교세 내는 게 아까워서 교회도 빠져요.
부처는 서양에 와 있고 예수는 동양에 가 있는 셈입니다.”

-다큐멘터리 필름에서 ‘나는 자연 안의 나뭇잎 같은 존재다’라는 말을 했지요.
나는 우연의 산물이고, 내가 없어도 자연은 순환한다고요. 그 뒷말이 걸작이더군요(웃음).
‘뭔가 찾을 필요도 없다. 잃어버린 것이 없으니까.’ 어떻게 그 정도로 가벼워질 수 있나요?

“사는 게 금방이잖아요(웃음). 나는 정말 나뭇잎 하나하나가 세상 사람들처럼 느껴져요.
때가 되면 없어졌다가 봄이 되면 새순이 돋아나듯.

일전에 한 어린이가 하나님께 하는 질문을 읽은 적이 있어요.
“유명한 사람들은 다 TV에 나오는데 하나님은 왜 안 나와요?”
“하나님이 만든 동물 식물은 다 봤는데 왜 더 새로 만들지는 않으세요?”
나도 그 비슷한 생각으로 살아요.
언젠가 지구에 살다 없어졌거나 다시 나타날 수도 있는 생물을 내 식으로 막 그리면서요(웃음).”

-우주의 정원사로 사는 게 행복한가요?

“행복이 뭔가요? 배탈 났는데 화장실에 들어가면 행복하고 못 들어가면 불행해요.
막상 나오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죠. 행복은 지나가는 감정이에요.”

-그렇다면 어떤 감정이 중요한가요?

“편안한 마음으로 감사하며 사는 거죠.
눈떴는데 아직도 하루가 있으면 감사한 거예요.
어떤 일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편한 세상이 돼요.
매일매일 벌어지는 좋은 일도 안 좋은 일도 수고스럽겠지만 그냥 받아들이세요(웃음). 날씨처럼요.
비 오고 바람 분다고 슬퍼하지 말고 해가 뜨겁다고 화내지 말고…”

-만약 20대 때 독일인 간호장이 선생의 그림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까요?

“하하하. 그 사건과 크게 연관 짓지 않아요.
어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처럼 살라고 태어난 사람이에요.
요셉 보이스가 그랬어요. 아이들을 위해 감자를 깎으면서 내가 지금 하는 게 조각이 아니고 뭐냐고요(웃음).”

“오래 괴로워하면 열의는 사라지고 괴로움만 남지요.
하지만 막상 붓을 던지려 할 때 불쑥 형상이 나와요. 그게 물고기도 되고 새도 됩니다.”
/이덕훈 기자

바람 불듯 훌훌한 말투로 노은님이 말했다.
문득 인터넷 블로그에서 본 노은님에 대한 일화가 생각났다.
전시회 보러 시골에서 새벽 첫차 타고 딸아이와 갔더니 노은님 화가가 직원들 몰래 그림을 신문지에 싸서
주더라고. 갖고 싶어도 너무 비싸 울상 짓던 차에 놀라운 선물을 받았다고.
노은님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너무 멀리서 전시회를 해서 모녀를 고생시켰잖아. 내가 뭐라고…”

천사 미카엘의 도시. 미헬슈타트의 고성 옆 삼백년 된 극 장에 노은님이 산다.
72살의 개구쟁이는 가끔 파티를 열어 이웃을 초대한다.
그 파티엔 공주도 시장도 사장도 오고 동네 약사와 골프장 캐셔, 이주노동자도 온다.
앞마당의 오리와 뒷산의 여우, 사슴과 멧돼지가 왔다 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독일의 미헬슈타트시립미술관은 ‘우주의 정원사'로 불리는 이 표현주의의 거장을 위해
영구전시실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26/201807260201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