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11.22 03:03
이문열 '과객'
우리나라에 '사생활'이라는 단어가 유통되기 시작한 것이 1960~70년대였던 듯한데
처음에는 어쩐지 듣기 민망하고 거북한 표현이었다.
그런데 차츰 한국인에게도 사적 영역이 확보되면서 점차 사용하기 편해졌다.
하지만 아직도 문맥에 따라서는 무언가 은밀하고 수치스러운 연상을 야기한다.
이문열 단편 '과객'(1982)의 주인공은 어느 날 불쑥 나타나서 자신을 '과객(過客)'이라며
이문열 단편 '과객'(1982)의 주인공은 어느 날 불쑥 나타나서 자신을 '과객(過客)'이라며
하룻밤 신세를 지고 싶어 하는 낯선 이에게 잠자리를 제공한다.
두 사람은 밤늦도록 대화를 나눈다.
과객이 떠난 후 그는 생각한다. '나는 왜 신원이 불확실한 사람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었을까?'
그러다가 그것이 현대에 와서 갑자기 불가침의 영역이 된 '사생활'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음을 깨닫는다.
지난주 대통령의 변호인으로 선임된 유영하 변호사가 국민에게
"대통령도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이 있음을 존중해 달라"고 호소한 것은 지독한 악수(惡手)였다.
박 대통령 자신이 "나는 나라와 결혼했다"고 공언했다고 해서 사생활을 가질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최순실을 비밀 책사로 삼아서 국정을 사유화해버린 것이 드러났다.
그래서 그야말로 '사생활'의 영역으로 보호받아야 할 보톡스 주사나 태반 주사 같은 것도
극도의 반감과 역겨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모든 여성 정치인이 메르켈 총리처럼 수수하고 검박(儉朴)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여성 정치인은 국사보다 외모 관리에 더 관심이 많다는 의심을 받아서는 안 된다.
더구나 공식 의료진이 있는데 외부 병원에서 대리 처방을 받고 금지 약물의 반입 사용 혐의까지 받으니
국민이 불신하고 분노하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미 최순실을 위해서라면 각료와도 하지 않는 독대를 재벌 총수들과 하면서
온갖 구차스러운 방식으로 대통령의 품위와 나라의 국격을 추락시켰다.
최순실의 광고 회사는 물론 최씨의 딸 친구 아버지 사업까지 직접 챙겨주었다는데
국민이 참고 이해해야 할 사생활이 얼마나 더
있는 것일까?
박 대통령은 자신이 온 국민과 나라를 시궁창에 처박았다는 사실과
박 대통령은 자신이 온 국민과 나라를 시궁창에 처박았다는 사실과
그로 인한 국민의 집단적 모멸감을 의식하지도 납득하지도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구원받을 길이 없다.
그러나 나라는 구해야 하는데
연대책임감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새누리당과, 정권을 이미 거머쥔 것 같이 날뛰는 야 3당을 바라보며
국민의 시름과 절망은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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