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9.04 03:10
바람의 배경
마을에 바람이 심하다는 건, 또 한 명이 죽었다는 소식이다.
밀밭의 밀대들이 물결처럼 일렁거렸다는 뜻이기도 하고,
언덕 위 백년 넘은 나무 하나가 흔들리는 밀밭을 쳐다봤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아이 하나가 태어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김없는 일이기도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기도 하다.
흙먼지 일으키며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 차례 밀밭 사이를 뛰어다닌다.
아이들도 안다. 바람을 굳이 피하지 않는 법을.
마을은 죽음과 친하고 죽음이 편하다.
죽음의 배경, 그것으로 족한 마을에 오늘도 바람이 분다.
―허연(1966~ )('내가 원하는 천사', 문학과지성사, 2012)
선들바람이 분다.
마음이나 말은 작은 바람이 되고, 기억이나 영혼은 큰 바람이 된다고 생각한 적 있다.
그래서 유독 바람 부는 날에는 사무침이 밀려드는 것이라고.
바람은 또 그걸 알고는, 누군가를, 그 무엇인가를 데려다주는 것이라고.
그런 바람(風), 바람(願), 바람(氣), 바람(色)들은 빈 데서 생겨나고 빈 데로 사라진다.
바람이야말로 우리들 바탕이자 배경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했던 시인이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바람이 분다, 그러나 바람은 인간의 마음으로 불지 않고 미안하지만 바람의 마음으로 분다"고 했던
시인들도 있다.
바람이 불고 누군가 태어났다.
바람이 불고 누군가 죽었다.
생기와 소멸, 어김없음과 아무렇지도 않음이 바람에 실려 왔다 실려갔다.
아침 바람이 선득하다.
눈을 감고 손을 내민다. 오늘은 오늘만큼만 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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