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8.30 03:10
1987년 5월 19일. 경주 황성동에서 신라 석실분 발굴이 시작됐다.
조사단장인 이강승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실장, 발굴 책임을 진 동국대 이희준 교수는
분노를 억누르며 조사에 임했다.
이들이 분노한 것은 옛 무덤임을 알면서도
건설회사 측이 포클레인으로 유적을 두 번에 걸쳐 무참히 파괴했기 때문이다.
무덤 전체를 8조각으로 구획하고 서남쪽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무덤 전체를 8조각으로 구획하고 서남쪽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곧이어 흙더미에서 자그마한 토용(土俑)이 연이어 출토되자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한 해 전 십이지와 토용 발굴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경주 용강동고분에 버금가는
중요 유적임을 알았기에 안타까움도 더욱 커졌다.
이어 동북쪽 흙 속에서 완전해 보이는 토용 1점이 모습을 보였다.
이어 동북쪽 흙 속에서 완전해 보이는 토용 1점이 모습을 보였다.
흙을 제거하자 반듯하게 엎드린 여인상의 윤곽이 드러났다.
깨끗이 세척하니 오른쪽으로 몸을 조금 비튼 채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여인이었다.
머리는 곱게 가르마를 타 뒤에서 묶었고 소맷자락에 파묻힌 왼손으론 부끄러운 듯 입을 살짝 가렸다.
오른손엔 술병을 들었고 긴 치마 앞으로 두 발끝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
조사단은 헌화가 속 수로부인(水路夫人)을 떠올렸고 수로부인은 이 토용의 애칭이 됐다.
이 교수는 토용의 복식으로 보아 무덤의 조성 연대를 7세기 중엽으로,
이 교수는 토용의 복식으로 보아 무덤의 조성 연대를 7세기 중엽으로,
주인공을 왕에 준하는 지위의 진골 귀족으로 보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지증왕 3년(502년) 순장을 금지했다고 한다.
그 후 사후세계에서 함께 지낼 사람들을 흙으로 빚어 묻어주게 됐다
.
이 무덤 주인도 사랑스러운 '수로부인'과 함께하고 싶다는 소망을 유언으로 남긴 것은 아닐까?
석실분 훼손 사건을 계기로 경주 일원 유적들의 보호 필요성이 대두됐다.
석실분 훼손 사건을 계기로 경주 일원 유적들의 보호 필요성이 대두됐다.
1990년에는 인접한 곳에서 신라 초기의 대규모 제철단지가 발굴됐다.
이 교수는 무참히 부서진 황성동석실분의 음덕 때문에
지금까지 황성동 일대에서 중요 유적이 연이어 발굴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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