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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음] 소비에트 최고 예술가는 왜 '비겁한 삶'을 선택했나 (조선일보)

colorprom 2017. 8. 29. 19:18

소비에트 최고 예술가는 왜 '비겁한 삶'을 선택했나

영국대표 작가 줄리아반스의 새 장편소설 <시대의 소음>
특이하게도 이 소설의 주인공은 실존인물인 음악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이다.
그의 평생을 지배했던 자기혐오, 인민 그리고 음악에 대한 고민이 여기에 담겨있다.

입력 : 2017.06.19 10:02

[북스]
 

맨부커상 줄리안 반스 새 장편… 쇼스타코비치 감춰진 내면 담아
예술은 이념·인민의 것이라며 자기 혐오와 싸워 음악 지켜내
시대의 소음
줄리안 반스 지음|송은주 옮김
다산책방|272쪽|1만4000원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왈츠 2번을 들으며 이 소설을 읽는다.
한 번만 들어도 잊기 어려운 멜로디가 있다.
'붉은 군대' 행진곡의 강요된 경쾌와 시베리아 특유의 쓸쓸함이 엇갈리는, 이 곡 역시 그렇다.
소비에트 연방, 즉 소련으로 불리던 시절의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 작곡가.
그의 재능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질 무렵, 쇼스타코비치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쓴 작가는 차갑게 요약한다.
"용기는 자기 음악에, 비겁함은 삶에 쏟았다."

작가는 영국의 줄리안 반스(71). 이름만으로 책을 읽고 싶게 하는 일급 작가다.
영국 소설가가 받을 수 있는 문학상을 거의 빠짐없이 받았는데,
가장 대표적이랄 수 있는 맨부커상만큼은 2012년에야 받았다.

수상작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기억을 윤색하고 과거를 미화하는 인간의 염치(廉恥)에 대한 질문이었다.
수상작의 번역본이 출간됐을 때, 신간 서평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다.

"심사위원들의 조급함으로 데뷔작 수상의 영예를 안은 뒤 잊힌 작가도 있고,
심사위원들의 게으름 탓에 뒤늦게 태작으로 수상하는 작가도 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명망 있는 작가가 받아야 할 작품으로 맨부커상을 받은 모범 사례다."
줄리안 반스. /게티이미지코리아
'시대의 소음' 역시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다.
반스맨부커상 수상 이후 5년 만에 처음 펴낸 장편.
전술했듯, 쇼스타코비치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역사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다는 건, 사실 작가 입장에서는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일과 비슷하다.
실존 인물의 열기에 눌려, 작가 특유의 무늬와 빛깔은 휘발해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번 장편에서 반스의 목적은, 영웅의 일대기(一代記)가 아니다.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을 선택한 줄리언 반스쇼스타코비치를 영웅이 아니라 겁쟁이라 썼고,
그래서 더 위대할지 모른다는 삶의 아이러니로 독자를 설득한다.
그러므로 안심하시길.
당신이 만약 쇼스타코비치와 그의 음악에 친숙하지 않더라도, 이번 여행의 큰 장애물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반스쇼스타코비치 인생의 세 순간을 포착한다.
1936, 1948, 1960년. 공교롭게도 러시아에서 불행이 닥치는 해라고 알려진 윤년(閏年)이다.
공간적으로는 엘리베이터 옆 층계,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 그리고 자신의 운전사가 몰았던 자가용 안.

각각 이 책 1·2·3부의 배경인 시공(時空)을 통해, 쇼스타코비치로 빙의한 반스는
"겁쟁이가 되기도 쉽지 않았다. 겁쟁이가 되기보다는 영웅이 되기가 훨씬 더 쉬웠다"고 주장한다.

소비에트의 발표문과 기록으로 남아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공식 인생은
사회주의 예술의 대변자이자 노력 일꾼이었다.
하지만 회고록과 증언으로 재구성한 그의 내면은 달랐다는 것.

자신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공연을 찾았던 스탈린이 고개를 '갸웃'거린 1936년부터,
쇼스타코비치는 말 그대로 납작 엎드린다.
예술은 예술 그 자체가 아니라 인민과 이데올로기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지도자의 말을 반박하는 순간,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구까지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으니까.

따라서 '시대의 소음'에서 중요한 건, 플롯이나 내러티브가 아니다.
전작에서 인간의 염치를 물었던 반스는, 이번에 용기와 비겁의 차이를 묻는다.

개인적으로 스트라빈스키를 최고의 작곡가로 존경했던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이 보내준 뉴욕 방문 공식 연설에서 조국 러시아를 버리고 미국으로 망명한 스트라빈스키
비난한다.
쇼스타코비치의 침대 옆 협탁에는
르네상스 화가 티치아노의 작품 세금이 그려진 엽서가 늘 끼워져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신과 황제 중 누구에게 세금을 내야 하느냐고 예수를 놀렸다.
반면 사회주의 작곡가의 고민은 이것이었다.
예술은 인민의 것인가, 예술의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의 것인가. /위키피디아

그의 평생을 지배했던 단어는 공포수치라고 반스는 썼다.
영웅이 된다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인가. 잠시만 용감해지면 되지 않는가.
총을 꺼내고, 폭탄을 던지고, 독재자를 없애고, 더불어 자신도 없애는 정도의 시간만 있으면 가능하니까.
하지만 겁쟁이가 된다는 것은 평생토록 이어지게 될 길에 발을 들이는 일.
단 한 순간도 쉴 수 없다. 스스로에게 변명하고, 머뭇거리고, 움츠러들면서, 모욕을 견뎌야 하니까.

쇼스타코비치의 입을 빌려 반스는 묻는다.
"공산주의 사회에 살지 않으면서, 공산주의자가 되기란 얼마나 쉬운가."

평생 자기혐오에 시달렸던 사회주의 예술가가,
소위 샴페인 좌파·리무진 좌파 예술가들을 비난하는 대목은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다.

건설 노동자들이 죽어나갈 때는 비판 한마디 없다가
소련 백해 운하의 장엄미만을 찬양했던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
스탈린에게 칙사 대접을 받은 뒤
러시아에서도 굶는 백성이 있느냐고 천진하게 되물었던 노벨상 작가 버나드 쇼,
소비에트의 루블화 저작권료를 받아 챙기며 "물질적 보상은 마다하지 않겠다"라고 했던 철학자 사르트르….

실천 없이 말로만 외치는 정의, 다시 한 번, 얼마나 간편한가.

다시 쇼스타코비치왈츠 2번에 귀를 기울인다.
영화 '와이즈 아이드 셧' '텔미 썸딩' '번지점프를 하다' 등으로 이미 우리에게도 익숙한 곡이다.
이데올로기가 강요한 경쾌미와 자신의 내면이 빚어낸 애수 사이에서,
모욕으로 점철된 삶을 견뎌야 했던 작곡가의 아이러니를 새삼 확인한다.
시대의 소음 속에서, 쇼스타코비치가, 아니 반스가 묻는다.
예술은 과연 누구의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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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