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내리막길 2014년 8월 22일 금요일
누가복음 22:54~22:71
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5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63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66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67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70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71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57절): 여기서 ‘부인하다’는 뜻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아르네오마이’인데, 이는 ‘고백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단어 ‘호몰로게오’와 정반대되는 의미를 가진다.
베드로가……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60절): 예수님의 염려가 현실이 되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은 제자들의 실패를 의미했다.
그들은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혹과 시험에 빠졌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길이 어느새 예수님을 부정하는 자리로 바뀌어버렸다.
이 사람아……알지 못하노라(60절):
베드로에게 3 번째로 물어보는 사람은 사도 요한에 따르면 베드로가 귀를 베어버린 사람의 친척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 번 부인하는데, 부인하는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욕하더라(63~65절):
예수님께서는 신성모독죄로 고발 당하셨는데, 역설적으로 고발한 자들이 지금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고 있다.
공회(66절): 유대 사회의 최고 법원인 산헤드린 공회를 가리키는 것이다.
70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회를 열수 있는 정족수는 23명이다.
산헤드린의 결정은 유대인들에게 절대적이었지만,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기에 사형판결만은 로마 총독의 권한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69절):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인자)은 이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세상을 주관하며 다스리게 되실 것이다.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내리막길 2014년 8월 22일 금요일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으셨지만, 재판장에 피고인으로 세워지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비참하거나 고독하지 않으셨습니다.
절망과 비탄의 자리를 새로운 시작점으로 선언하십니다.
죄가 없으시지만 죄인의 자리에 서셔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기운차게 시작했던 걸음이 힘을 얻지 못하고 방향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이 부치는 일을 맡아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지나친 자신감이나 확신이 본질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어 실패를 마주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의 모습이 낯설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많은 일들을 맡고, 여러 일을 착수합니다.
교회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기 위해 여러 모양으로 결단하고 참여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처음의 확신과 기대를 마지막까지 올바르게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을 위해 우리의 걸음이 시작되었고, 어디를 향해 뻗어 있는 길인지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 마주하는 현실에서 엉뚱한 것을 확신하고 밀고나가기 일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자신의 길을 올곧게 가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앉아계신 그 보좌를 바라봄으로,
우리를 위협하며 넘어뜨리는 상황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걸음이 주님을 따라 가고 있는지 살펴보고, 또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확인해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망들이 우리 삶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고백하는 삶 vs 부인하는 삶 2014년 8월 22일 금요일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가복음 3:13절을 보면, 예수님은 전도하고 귀신을 내쫓게 하기 위해 제자들을 불렀는데,
주목할 것은 그보다 중요한 이유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려고” 제자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흩어져서 사역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늘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위기를 당하는 순간이 오자
생명에 위협을 느낀 제자들이 모두 하나같이 예수님을 떠난 것입니다.
죽어도 배반하지 않겠다던 베드로조차 혹시나 잡힐까봐 멀찍이 떨어져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더욱이 그는 한술 더 떠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냐는 질문 앞에서 그렇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전혀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기독교는 고백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로마서 10:9-10절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으로 의리 있는 제자가 되려면 말로만 의리, 의리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머물면서
예수님이 나의 주가 되심을 자랑스럽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 사는 삶 2015년 4월 1일 수요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때리고 희롱하며 욕하였습니다.
슬픔과 온갖 수치와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담담히 감당하시며,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십자가 앞으로 전진하고 계십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의 죄로 고발했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지금은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이것은 사실이며, 진리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부인하고 거부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진리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권위도, 다수의 의견도, 사실을 거짓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초월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진리는 변함없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진리는 아무리 권력이 많은 사람도, 돈이 많은 사람도, 지식이 많은 사람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은 그 어떤 것으로도 바뀌지 않을 진리입니다.
우리는 그 진리를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우리는 믿음이 연약해질 수 있습니다.
때로는 유혹와 타협 앞에서, 때로는 핍박과 고통 앞에서
진리를 향한 우리의 마음과 행동이 머뭇거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저하지 않고 진리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는 거저 얻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용기는 진리를 따르다 겪는 불편과 불이익을 꾸준히 감수해내는 훈련을 통해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나와 공동체는 불편과 불이익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예수를 재판한 산헤드린 2016년 7월 1일 금요일 (누가 22:66~71)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산헤드린에 주목하게 됩니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재판을 했습니다(66절).
수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병자를 고치고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보면서
점점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두려워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제거' 하고 싶어서 절치부심했습니다(눅19:47~48).
마침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강제로 붙잡아 재판에 넘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의 말에서 신성모독죄의 구실을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이기려 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자신들이 가진 권력의 힘으로 상대방을 강제로 억눌러 이기겠다는 마음의 밑바닥에는
'두려움' 이 깔려있었습니다.
바로 이 '두려움' 이 악의 진짜 모습 입니다.
두려움이 상대를 잔인하게 대하도록 부추깁니다.
두려움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립니다.
두려움이 공연한 억측을 하도록 마음을 이끕니다.
이러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총 안에 살아가는 길 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심을 확신할 때 세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습니다.
담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1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5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어려움은 본문에서 어떻게 묘사되고 있습니까?
1 똑같은 목숨의 위협 앞에서 베드로와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였나요?
5 나는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이 나의 주되심을 자랑스럽게 고백하고 있나요?
- 베드로가 예수님을 3 번 부인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고 연약해질 때는 언제입니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믿음의 걸음을 걷게 해주십시오!
삶의 목적과 이유를 분명하게 깨닫고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는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이 나의 주가 되심을 자랑하는 참된 제자, 의리 있는 제자가 되게 해 주세요.
+ 진리를 알게 하시고 진리를 사랑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진리를 위해 불편과 불이익을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세상의 권력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심을 확신하며 담대하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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