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2.2(수)
요 11:17-21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1.묵상하기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베다니와 예루살렘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은 나사로의 죽음을 조문하기 위해 왔습니다.
나사로와 가까운 사이였던 예수님은 더 지체하지 않고 오실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틀을 더 지체하신 후에 나타나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부재(不在)를 아쉬워합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분명 나사로를 죽지 않도록 하실만큼 능력이 있으심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그 믿음을 자기 생각의 범위로 좁혀서 받아들였습니다.
즉, 나사로를 죽게 하지 않으실 예수님께서 죽음 이후에는 손을 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생과 사를 구분짓는 기준을 마르다 자신이 정하고, 그에 따라 예수님의 부재를 한탄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정한 때에,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일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때나 장소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기꺼이 다른 방식을 택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부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재하신 듯 한 시간 속에 우리는 기다림을 배웁니다.
간절함을 배웁니다. 삶의 불순물들이 정화됩니다.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2.기도하기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의 경험과 사람들의 조언에 하나님께서 갇혀 계시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때때로 하나님께 불평과 긴 한숨을 쉴 때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과 때가 가장 적합한 때와 방식임을 배워 갑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며 신실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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