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23 월요일 / 임 은미 (유니스) 목사 묵상
"우리는 떠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창 세 기 36 장 6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Esau took his wives and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members of his household,
as well as his livestock and all his other animals
and all the goods he had acquired in Canaan,
and moved to a land some distance from his brother Jacob.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하는 이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다.
에서가 다른 곳으로 떠난 이유가 무엇인가?
부딪히기 싫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떠남"이었다.
함께 더불어 살면서 부딪히지 않는 방법을 모색(?)할 만도 했지만
에서는 "떠나는" 선택을 했던 것이다.
부딪히지 않는 방법이
꼭 붙어 있으면서 어찌하던지 간에 다툼.. 마찰.. 얼굴 붉어짐 없애려는 노력일 수도 있지만?
서로를 떠나는 것 역시 선택중 하나라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러니..
같이 붙어 있어 사이가 좋아지지 않으면?
떠나는 것도 한 방법?ㅋㅋ
나는 우리 주님이 우리들에게 바라는 것들이
전혀 가능하지 않은 것들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감당치 못할 것 같으면? 피할 길을 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하신다.
내가 계속 관계 안에서 부딪히는 사람이 있다면?
감당치 못할 관계가 계속 지속된다면?
"피할 길"을 주님은 허락해 주신다는 것 아닌가?
"떠남"이 또 하나의 선택이라고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자비와 긍휼과 은혜"의 통로라고 생각해도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떠남"에는 관계적인 떠남도 있겠지만
"각 가지 형태의 도움"에 대한 "떠남"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제 나는 내 큰 아들 피터를 만났다.
피터는 내가 케냐에서 키운 9명의 아프리카 자녀들 중 제일 큰 아들이다.
내가 가장 믿음직스럽게 여기고 귀엽게(?)여겼던 아들이 큰 아들 피터이다.
피터가 한국에 지금 유학 와 있다.
내가 피터의 유학비(?) 대 준 거 아니다.
나는 내가 키운 애들 중 그 누구도 한국에 와서 공부하리라..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계획을 한 적도 없다.
대학교까지 시켜(?) 주었으면 이제 다들 스스로 자립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내 양아들들.. 딸들(?)...대학교 과정(?) 까지 나름(?) 도와 주기는했으나...
피터의 경우는 대학교 2학년까지... 디플로마 과정을 마쳤을때
3학년 4학년 학위 과정은 자기 스스로 해 보겠다고
피터 스스로 더 이상의 도움을 거절했다.
그래서..
이 녀석... 잘 컸구나... 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다른 자녀(?) 하나는 수진이가 어렸을때 부터 도와 준 친구인지라..
어찌 하다 보니..대학교까지 도와 주게 되었는데
디플로마까지 도와 주겠다고 도와 주었더니
어떻게 학사 학위 다 받을때까지 도와 주면 도와 주어야지 디플로마에서 그만 두냐고..
그럴려면 왜 도와 주었냐고 처음부터 도와 주지 말지..이런 말을 해서리..참 황당해서리..
뭐 이렇게 자기가 받은 도움에 반응할 수 있는가 싶기도 했지만
덕분에 배운 것은
"아! 우리도 하나님이 도와 주시다가 조금(?) 도움을 멈칫 하시는 것 같으면
왜 안 도와 주시냐고? 이러러면 여기까지 인도는 왜 하셨냐고?"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은 아닐까? 접목 해 보면서
그 경험을 레슨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에 위로를 받은 적이 있다.
지금 그 학생은 하도 도와 달라고 나 아니면(?) 도움 받을 때가 없다고
그야말로 "배째라" 하는 식으로 도움을 청해서 일단 도와는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친구는 언제인가 부터 우리 수진이를 너무나 괴롭(?)히는 차원의 친구가 되었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똑같이 누구를 비슷한 방법으로 도와 주었는데
누구는 그 도움으로 자립해 보려고 힘 쓰고
누구는 그 도움으로 의타심이 더 길러져서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하고
더 해 달라고 기대하고
기대에 부응 안 되면 원망하고 탓하고..거 참...
나는 아프리카 케냐 아이들을 한 집에서 9명을 길렀(?)다.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열매를 보아 알게 된다고 하면 내가 맺은 열매(?)는 과연 무엇일까?
다들 이제는 자립했다.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고 자기 회사를 차리기도 하고 직장생활 하기도 하고 신학교도 다니고
남편과 내가 키운 아프리카 아이들..법적으로 입양한 아이들은 아니었다.
다만 같이 데리고 살았다는 것이지..
친 자식인 수진이가 이 아이들로 인하여 무엇을 얻고(?)무엇을 잃었는가?
어제 수진이랑 같이 아마 3시간은 족히(?)
우리들이 이들과 함께 살면서 겪어야 했던 많은 배움(?)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부모인 우리보다 우리 수진이가 양보(?)하면서 자라난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닌 것을 안다.
어떠한 값을 우리 가족이 지불(?)했던지 간에
우리는 주님께 "감사의 제사"를 올려 드린다.
주님이 허락하신 일들이었고
우리는 그 과정 가운데서 "복음의 통로"가 되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할 수 밖에 없었고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의 삶에 각자 하나님이 가르치신 레슨들이 있었다.
나는 입양(?) 한 양자.. 양녀를 절대로 내 친자식 보다 더 사랑할수 없었음을 배웠고
그 덕분에 양자. 양녀인 우리들을 친 자식인 예수 그리스도 보다 더 사랑하사
친자식인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양자의 영을 받은 우리들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조금이나마 깨달아 알게 되었다는 것..
그 외에도 자식들의 배신(?)으로 인하여 뼈 아픈 고통(?)을 겪으면서
숱하게 하나님을 배신 했을 나를 돌아보게 되고
그 배신감 속에서도 꿋꿋이 나를 사랑하시고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역시 쪼금이나마 깨닫게 된 것이다.
오늘 묵상으로 돌아와서.
나는 수진에게 "떠나야 할 관계"들에 대하여 어제 이야기 해 주었다.
누에가 고치로써 나비가 되기 전까지 온 몸에 고통이 있는 것 같을때에
그 누에를 도와 준다고 감겨 있는 고치들을 가위로 베어 준다면
그 누에는 결코 나비가 되어 날 수 없다는 것..
그러니..칭 칭 감고 있는 누에의 고치를 가위로 베어 주는 것이 참된 도움이 아니라
(근데 이 표현 맞나? ㅋㅋ 누에? 고치? 음.. 혼동되는 순간이다 ^^)
혼자 칭 칭 메이는 고치 가운데서 생존하여 남아 있을 수 있도록
가만히 지켜 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즉슨..
떠나야 할 사람에게는 떠나야 한다는 것..
그것이 그 사람을 위한 참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관계에 있어서 "떠남"이라는 단어는 결코 쉬운 단어가 아니지만.
우리들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더 친밀감을 형성하기 위하여, 우리가 더 성숙하기 위하여,
또한, 그 사람의 성숙을 위하여
우리들에게 떠나야 할 사람..떠나야 하는 장소, 떠나야 할 일들, 떠나야 할 말들이 있다고 생각 되어진다.
주님 오늘도 최고의 날입니다.
떠나야 할 자리와 머물러야 할 자리들을 잘 구별하도록
내 삶에 주님 기뻐하시는 선택의 지혜를 주시옵소서
모든 관계 가운데 부딪힘이 없는 관계가 되도록 도와 주옵소서
성경에는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으라 하셨으니
저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에 모든 묵상이 주님께 열납 될 수 있도록
오늘도 저의 삶을 주장하여 주옵소서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 저를 보시면서 하루종일 기쁘시면 참 좋겠습니다.
묵상 구절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 창 36장 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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